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문유석] 미스 함무라비(2016)

독서일기/법률

by 태즈매니언 2017. 3. 14. 18:19

본문


공들여 쓰신 문판사님께 죄송해질 정도로 올해 읽었던 어떤 책보다 빨리 읽었네요. 최근에 본 야기 노리히로의 만화 <클레이모어>보다 더 급하게 읽었습니다. 화장실 갈 생각도 안들더군요.

소설이긴 한데 '법정 활극'이란 뒷표지의 표현이 더 맞는 꽁트(엽편소설) 모음집 느낌이었습니다. 각 장 사이에 '판사의 일'이라는 막간 설명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더군요. 원래 한겨레신문에 매주 연재하던 글을 모아서 펴냈으니 그럴만 하지요.

그래도 에필로그의 깔끔한 마무리를 보면 판사의 생활을 소재로 한 본격소설도 충분히 쓰실 수 있으셨을 것 같던데, 독자들이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길을 택한 것 같았습니다. 사법시스템과 판사에 대해서 시민들이 갖고 있는 오해와 선입견을 지우기 위해서 일부러 <천사들의 합창>, <5학년 3반 청개구리들>이나 <호랑이 선생님>같은 장르를 고르신 게 아니었을지 짐작해 봅니다.

그간 봤던 진지한 법조계의 내막을 다룬 비분강개한 논픽션들은 대부분 사법부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미 정한 독자들에게 확증편향의 도구로 오용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런 우려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미덕인 것 같고요.

좌배석 박차오름 판사, 우배석 임바른 판사, 한세상 부장으로 구성된 서울중앙지법 제44부(가상이래요 ㅎㅎ)를 통해 법원의 판사들도 별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그 별다를 바 없는 이들이 최대한 성실하고 불편부당하고자 악전고투하고 있는 모습을 힘빼고 보여주니 부담없이 집어들기 좋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해볼 내용들도 많았는데 저는 3부에 나오는 "성공의 길" 챕터 보면서 웃음보 터진 느낌이 젤 강렬하네요.

-------------

85쪽

어느 분야든 대다수의 일하는 이들은 화려하지 않고 튀지도 않는 일들을 묵묵히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은 호들갑스러운 탄식과 성급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묵묵히 굴러간다.

113쪽

임 판사의 눈에는 발표자 얼굴 옆에 말풍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는 겸손합니다!' '저는 예의 바른 사람입니다.''어려운 질문으로 절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말풍선이 하나씩 떠올라 법원 대회의실 안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281쪽

"법정에서 가장 강한 자는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판사야. 바로 우리지. 그리고 가장 위험한 자도 우리고. 그걸 잊으면 안 돼."

308쪽

형사재판을 하다보면 그런 생각을 한다. 법이나 재판이란 건,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안온한 중산층의 도덕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