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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웅] 검사내전(2018)

독서일기/법률

by 태즈매니언 2018. 8. 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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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에 이 책을 펴지 말았어야 했는데. 맨 첫머리에 나오는 사기꾼 할머니의 에피소드가 너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읽다보니 결국 세 시간 반이 순삭됐다. 악마같은 책 편집자님, 내일 아침 출근은 어찌하라고. .

이 책의 저자 김 웅 검사님은 1970년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문체가 발랄하고 경쾌하다. 69년생인 문유석 판사님 책도 좋아하는데 두 분 다 그 연배의 아재로서 참 멋진 개인주의자들이다. 두 삼촌뻘 중에 입담스타일은 이 분이 내겐 더 맞는 듯 ㅋㅋ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싶은 책이고, 형사사건 경험이 없는 내가 토달아서 뭐하겠나. 거의 대부분의 책 페이지마다 저자의 풍부한 독서량이 녹아있다.

...

다만, 네 번째 파트인 <법의 본질>에 들어간 내용 중 반절 정도는 덜어내고 좀 더 묵히신 다음에 다음 책으로 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은 있었다. 경세가처럼 갑자기 대한민국 전반의 문제에 대한 본인의 시각을 짧은 분량으로 서술하다보니 허점도 보이고.

하지만 이렇게 진입장벽으로 보호되는 직역에 있으면서도 생활인으로서의 자세를 놓지 않는 이들의 담담한 경험담과 소회를 전달해주는 책은 우리 사회에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벌써 12년 전 일이지만, 지금은 국회의원이 되신 금태섭 검사님이 <수사 잘 받는 법> 1회 연재 후 조직에서 겪었던 고초를 생각해보면 현직 검사가 이런 책을 펴내고 또 많이 팔린다는 사실이 반갑다.

 

법률 제정안이나 개정안을 검토할 때 벌칙조항을 안넣거나 안건드리면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갑님들을 앞으로는 좀 더 열심히 설득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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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검사보다는 재배당과 이송을 적게 하는 검사가 좋은 검사다. 재배당을 하게 되면 모든 수사가 일시에 얼어붙게 되고, 새로운 검사가 재배당받은 사건을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9쪽

 

정치와 권력의 힘은 성층권에서 행사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비열하고 무서운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62쪽

 

흔히 수학, 과학을 배우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굳이 수학과 과학을 배우는 이유는 이성과 논리에 따라 판단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함이다. 물론 대부분 그런 과학적인 사고체계는 졸업장 속에 남겨두고 온다. 그래서 고등교육 과정을 마쳤음에도 우리는 미신과 우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오류와 맹신의 순교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67쪽

 

미로를 빠져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감도를 만드는 것이다. 위에서 보면 미로도 별 것 아니다. 조감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기록들을 다 모아 일람표를 만들어야 한다. 기록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빠짐없이 신원을 확인한다. 그 후 전과 조회와 수사경력 조회를 통해 그들의 모든 사건 기록을 모은다. 이렇게 모은 기록에서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추출해서 인물 리스트와 타임 테이블을 만든다. 그럼 특정 시기에 특정인이 어떤 역할을 했고 무엇을 했는지 드러난다.

 

96쪽

 

"매달 300만원 씩 꾸준히 수익이 나는 가게는 절대 매물로 나오지 않아. 그런 거라면 집에서 놀고 있는 자기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창업 브로커들이 너한테 친절한 이유는 딱 하나야. 네가 호구이기 때문이지. 네가 건네주는 권리금의 일부는 창업 브로커 몫이야. 창업 브로커가 권해주는 점포를 물려받는다면 네가 꽃다운 청춘이라고 주장하는 시간들의 대가로 받은 알량한 명예퇴직금을 전 점주와 창업 브로커 그리고 임대인에게 건네주는 꼴밖에 안 돼."

 

제대로 충고하려면 애정을 빼고, 주저하지 말고, 심장을 향해 칼을 뻣듯 명확하고 고통스럽게 해야 한다.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감안해서 애매하게 할 거면 아예 안하는 것이 낫다.

 

102쪽

 

그가 얼마나 열심히 수사했는지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고위급으로 출발하는 사람들은 수사권 조정 같은 자신들의 권한 강화에만 신경 쓰겠지만, 그 밑에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경찰이 유지되는 것이다. 사기꾼들이 그런 열혈 경찰관을 만날 때 사용하는 수법이 두어 가지가 있다. 양아치라면 그를 모함하고, 전문가라면 사건을 이송시켜버린다.

 

103쪽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은 큰 위기이다. 재산을 비롯한 물리적인 피해를 당할 뿐만 아니라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더욱이 사람과 우리 사회에 대한 신뢰도 잃는다. 살면서 누구나 어려움을 겪는다. 흔히 사람들은 위기가 기회라고 셜교한다. 정말 그럴까? 주변에서 그런 사례를 직접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듯 위기는 위기다. 그것이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은 위기를 겪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220쪽

 

검사실은, 학구적인 분위기도 없고 과거에만 천착하지만, 법이 우리 사회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는 자리이다. 뭐랄까,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사회 현실과 요청에 기초한 법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이상, 법의 지배와 실제적인 정의, 법적 안정성과 현실적인 법 감정 사이의 대립과 긴장을 직접 마주하고,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요구들과 그것들이 어떻게 법으로 반영되는지, 또 어떻게 왜곡되며 법 실무가들에 의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경험할 수 있다. 입법 절차에서 표출된 국민의 요구와 감정, 정상배들의 불온하고 무책임한 책동들, 그 사이에서 절차적 정당성과 중용을 지키려는 노력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점철되어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형식적인 법률들, 그것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255쪽

 

답은 되도록 말해주지 않는 것이 좋다. 답이라는 것이 도그마가 될 수 있고, 정작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꼭 말해야 한다면 질문한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서로가 조금이라도 성장할 수 있다.

 

258쪽

 

현상에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인터넷 댓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무척 어려운 과학적 추론이 필요하며 자신은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실패에 대한 인식이다. 원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283쪽

 

법률서비스는 보약이 아니다. 불가피할 때 부작용을 각오하고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일종의 치료약이다. 많이 이용한다고 몸과 정신이 건강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지만 변호사가 늘어나면 굳이 다툴 것 없이 합의로 해결할 문제도 소송이나 고소로 이어지게 된다. 소송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이라곤 다시는 송사에 휘말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정도일 것이다.

 

298쪽

 

결국 해결책은 인공지능에 의한 재판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인류가 집적해놓은 빅 데이터는 보다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결론을 제시해줄지도 모른다. 또한 인공지능에 의한 판결이라면 최소한 전관예우는 없을 것이다. 설마 인공지능 버전 2.0이 버전 1.0이 변호하는 피고인이라고 부당하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패러다임의 변화일지도 모른다.

 

301쪽

 

법조는 왜 유독 이렇게 과학기술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일까? 어쩌면 그건 과거 법조가 인문학, 철학, 종교로부터 권력을 강탈했던 과정과 과학기술이 법률가들을 대체하는 진행 경과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40쪽

 

세상이 플랫폼 기반의 기업들로 빠르게 재편되는 것에 발맞춰 우리 경제계는 재벌 가문 기업들로 재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등 세상을 호령하는 기업들은 플랫폼 안으로 공급자와 수요자를 끌어들여 그들이 공정한 거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가치를 교환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재벌 체제에서는 엄격한 지배와 피지배 속에 청탁과 특혜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뿐이다.

세계적인 플랫폼 기업의 세계에는 참여자들의 연결과 상호작용, 모두가 공유하는 새로운 가치가 있다면, 우리나라 재벌 체제에는 하청업체의 희생과 복종, 그리고 모두가 숭배해야 하는 새로운 왕자님과 공주님들이 있다.

 

372쪽

 

법, 궁금적으로 체제에 대한 신뢰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기대와 연관되어 있다. 자신의 미래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상황이라면 그 사회를 유지시키는 규범과 질서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 어렵다. 오히려 반감만 가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법에 대한 신뢰는 주도 세력의 교체나 권력 찬탈을 노리는 세력의 끊임없는 선전 선동을 이겨내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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