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서미경] 홍어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2010)

독서일기/한국사

by 태즈매니언 2017. 7. 10. 11:33

본문

 

 

날씨때문에 그런지 책읽는 것도 심드렁해졌는데 신선한 책을 추천받아 기분 좋네요. 동아시아의 해양문화는 주경철 교수님의 책하고, 인류학과 수업에서 오키나와와 제주도의 돼지문화의 유사성에 대한 걸 들은 정도인데, 이 책을 보니 나름 활발했던 동아시아 해양문화에서 조선은 역시 가장 궁벽한 곳에 있었더군요.

 

한양에서 가장 중죄인을 귀양보내는 오지였고, TV예능 프로그램때문에 유명해진 만재도와 별로 멀지 않은 신안군 우이도(예전 이름 소흑산도)가 신라시대 때부터 당과 왜 사이의 무역로로 조선시대에는 동아시아 해양문화의 끝자락과 이어진 길목이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

 

1801년 11월 제주도에 표류해온 여송(필리핀 루손섬) 사람들 다섯 명. 기구한 이 다섯 명과 반대로 같은 해 12월 우이도에서 출발해 풍랑을 겪으며 류큐로, 다시 여송으로 두 차례 표류를 당해 마카오와 난징, 베이징을 거쳐 4년만에 한국으로 귀국한 25세의 홍어장수 문순득. 문순득의 여정과 뒤늦은 여송인과 만남을 짚어 가다보면 당시 조선이 얼마나 바깥 사정을 모르는 나라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의 저자인 KBS 서미경 PD는 흑산도로 옮겨가기 전 문순득의 집에 머물렀던 실학자 정약전이 문순득의 표류여정과 견문을 채록한 <표해시말>, 문순득이 여송에서 마카오로 갈 때 탔던 선박을 관찰한 내용을 토대로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가 쓴<운곡서설>을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실제 문순득의 표류여정을 따라 취재하는데 이 과정도 무척 흥미진진합니다. KBS스페셜로 방영되기도 했다니 나중에 찾아 봐야죠. (신안군에서 제작비를 지원했다던데 아주 훌륭한 군수님입니다.)

 

책을 보면서 두 가지가 인상깊었는데 첫째는 상인의 영민함입니다. 외국과의 교류가 극히 적었던 조선시대 사람이고 따로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임에도 불구하고 홍어장수 문순득은 겨우 몇 달 정도 머물렀던 난생 처음 가보는 나라에서 잘 적응했고,그 나라 말까지 배워옵니다. 심지어 여송에서는 일해서 돈도 벌고요. 상법강의를 처음 듣던 날 교수님께서 상인들은 매우 영리한(clever)사람들이라고 하셨죠. 민사법의 법리들은 우선 상인들 간에 제도화 되었다가 차츰 사회전반에 받아들여져서 민법에 수용되어 왔다는 말씀도 기억도 남고요. 문순득과 같이 표류했다가 따로 송환된 다섯 사람들은 긴 포류생활을 겪고서도 별다른 견문을 전하지 않았다는 전문도 있고, 사고방식의 유연성 면에서도 양반이 두 번이나 표류했다면 낯선 외국에서 적응해서 살아남기가 훨씬 어려웠겠죠.

 

둘째는 국제법 중에서 가장 앞선 해양법이 서양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는 발견입니다. 문순득의 표류나 다른 표류와 송환의 기록들을 보면 조공책봉 관계를 떠나서도(심지어 외교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각국들이 자기네 나라에 표류한 외국인들을 구호하고 관리가 신문한 후, 송환하는 절차와 이에 대해 송환경비에 상응하는 답례품을 보내며 예를 표하는 외교적인 프로토콜이 19세기 초반에 확립되어 있더군요.(나라마다 수준차이는 있어서 류큐, 비엣남이나 태국, 자바왕국의 세련된 응대사례를 보다가 조선의 대응을 보면 후손으로서 낯이 뜨겁긴 합니다.ㅎㅎ)

 

심지어 고의로 네 번이나 중국의 표류한 제주도 사람 고한록은 중국에서는 배가 난파해서 표류한 외국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은 물론 난파된 배의 값까지 치러준다는 걸 알고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위장 표류를 했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지금의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국의 여유 ㅋㅋ)

 

규수의 시마즈 가문이 1609년에 류쿠를 복속시켰지만 류큐왕국이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조공 무역권 때문에 자신들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200년 동안 철저히 숨기면서 무역의 이익을 향유해온 모습이나, 일부 왜구들이 조선 정부가 류큐의 사절에 진상하는 물품에 대해 후하게 사례한다는 걸 알고, 류큐 조정의 서찰을 위조해서 40여년 동안 가짜 외교사절로 행세하면서 이익을 편취한 사례, 조선 관리가 이들의 속임수를 눈치채는 과정 등등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일차사료를 직접 읽고 해석한 건 아니지만 말미에 나오는 참고문헌 목록과 해외로케 취재일지를 따라가다보면 아마추어라고 낮춰볼 책은 아닙니다. <표해시말>의 기록에서 문순득이 본 카톨릭성당에 대한 묘사를 통해 그가 두번째로 표류되었던 루손섬 북부의 스페인 식민도시를 찾아내고, 중국 학자의 논문에서 마카오에서 표류한 고려(조선) 난민 문순득에 대한 신문기록까지 인용할 정도이니.

 

당시 동양 최대의 무역도시 마카오에서 금화, 은화, 동화로 거래가 이뤄지던 걸 목격한 문순득의 경험담이 정약전을 통해 정약용에게 전해져서 <경세유표> 중 화폐제도 개혁 아이디어를 줬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몇몇 식자들 사이에서만 돌고 말았겠지만요.

 

이런 걸 보면 조선 후기 이용후생 실학의 계승과 자본주의 맹아론류의 주장에 전혀 납득이 되지 않네요. 지금 우리나라는 무역의존도가 80%를 넘나들고, 세계 1~2위를 다투는 조선업 강국이지만 조선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은 전혀 없다고 하는 게 솔직하지 않을까요?

 

----------------

 

59쪽

 

문순득은 (귀양 온) 정약전을 집 근처에 모시고 태사도로 홍어를 사러 간다. 배를 두 척 부리면서 흑산도 일원에서는 상당히 큰 어상이었던 문순득은 큰 배로는 홍어를 잡고, 작은 배로는 잡은 홍어를 싣고 나주 영산포로 가서 팔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쌀과 곡식을 사다가 양식이 귀한 섬에 되팔아 이문을 남겼다.

 

106쪽

 

연산군 때인 1500년 11월에 류큐국에서 사신들이 도착했다. 예조가 그들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류쿡 사신들은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여기 온 지 40년 만에 우리가 또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1461년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사이에 류큐국 사신이라면서 조선을 찾아온 일이 무려 21번이나 있었다. 그러니까 그간 찾아온 류큐사진들은 모두 가짜였던 것이다.

 

119쪽

 

(류큐국에서는) 사람마다 매일 쌀 한 되 다섯 홉과 채소 여러 그릇을 주고 하루 걸러 돼지고기가 제공되었다. 또 여름옷을 내려주고 병이 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하고 약을 주었다. - <표해시말> 중에서

 

134쪽

 

일본에 점령된 오키나와 현의 학교에서는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면 나무로 만든 방언찰을 목에 거는 벌칙을 받았다. 이 방언찰을 벗으려면 다른 학생이 류큐어를 사용하는 것을 찾아내야 했다. 그 때문에 어린 학생들까지 서로 누가 오키나와어를 쓰는지 감시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방언찰은 1960년대까지 계속 남아 있었는데, 이 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273쪽

 

이강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는 개국 이래 외국 선박이 표류해서 해안에 다다른 일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입니다.그럼에도 이른바 문정(표류의 정황을 심문하는 일),양선(선박을 헤아리는 일)은 한낱 껍데기의 형식에 불과하며,이런 외국 선제의묘법을 하나도 제대로 탐구하려 들지 않습니다. 삼면이 바다인 해국으로서 미개한 상태를 고수하고만 있으니 식자의 한탄을 어찌 그칠 수 있겠습니까?"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