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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 전쟁과 역사 01 - 삼국편(2001)

독서일기/한국사

by 태즈매니언 2018. 3. 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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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미경님이 아니었더라면 전혀 몰랐을 책인데 세 편의 시리즈 중에 첫 권이지만 제 마음에도 쏙드는 스타일의 책이네요. 한국사를 지겨워하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이 시리즈를 선물해주면 판타지나 무협소설처럼 즐겁게 읽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요.

저자 임용한님이 사학도로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분이고, 동시에 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게 이채롭습니다. 이 책인 출판된 2001년의 저자 약력이라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요.(저자 홈페이지 주소가 무려 hanmir ㅋㅋ)

고대사에 속하는 삼국시대에 관한 사류가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그 시대를 분석하는 중세인과 현대인이 범하기 쉬운 실수들을 피해가면서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출판 당시 한길사에서 나와... 인기를 끌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소설적 상상력을 더한 부분들도 있는데 신학을 하셔서 인지 인간을 분석하는 통찰력도 있고요. (이언 모리스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사료가 없는 부분들은 가설로 채워나가야 하는데 동서양의 다양한 전쟁사 사례에 비추어 교과서나 제가 예전에 본 한국사 책에서는 들여다보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 고민한 흔적들을 찾을 수 있어서 읽는 내내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똑같은 지도를 보더라도 통신이나 포장된 도로가 없는 고대인의 세계에서는 큰 강의 수로가 지금의 고속도로와 철도를 합한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부분이 고맙네요. 요즘은 4대강이라고 해봤자 수상스포츠나 낚시터 아니면 자전거 길같은 느낌 밖에 없다보니 말이죠. 덕분에 국가의 흥망성쇠는 상당부분 지리가 좌우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죠.

레퍼런스가 없어서 완전히 신뢰한다고는 못하겠지만 제가 덕질하는 모페친처럼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을 연결지어서 폭넓은 시야로 분석하는 재능도 범상치 않습니다. 요새 국사학계 소장 학자들이 어떤 연구를 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대담한 전쟁사 책을 2001년에 펴내신 분이 학계를 떠났다면 아쉬울 것 같네요.

전 빨리 2권 읽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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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쪽

인간사회가 형성된 이래로 권력은 군사력과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근대 사회의 군사체제는 최강의 전투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지배층들에게 가장 유익한 형태로 결졍된다. 새로운 전술이 아무리 효율적이더라도 그것이 기득권층의 신분적 특권과 권위를 파괴하는 거이라면 절대로 채용하지 않는다.

56쪽

역사에서 분노를 배우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이 이야기가 주는 진정한 교훈은 약점 중의 약점,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최대의 약점은 체제와 사회구조가 가져다주는 약점이라는 사실이다.

71쪽

역사책에 한 줄 남겨진 기록만으로 누가 무엇 때문에 졌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동양의 역사책은 군인이 아니라 문관관료와 정신교육이 필요한 독서인층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73쪽

국내성이 관구검이나 모용황에게 허무하게 떨어진 근원적인 이유는 이 지역이 전반적으로 평야지대라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고, 한두 번만 패하면 방어망이 뚫려 버리기 때문이다.

97쪽

고구려군의 불행은 이 땅이 너무 좁다는 것이었다. 만주평원이라면 빙 돌아서 어느 한 나라를 쳐부술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나라는 좁은 반도인데다가 동쪽 땅의 1/3은 산악지대라 그 쪽으로는 대군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백제나 신라 어느 쪽을 치든지 충청도를 경유해서 내려가야 한다. 따라서 백제를 공격하면 신라에게, 신라를 공격하면 백제군에게 보급로가 노출되게 된다.

117쪽

따지고 보면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한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남부여'라는 국호는 남부의 귀족들을 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백제 왕실과 귀족들을 차별화하고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는 명칭이다. 이처럼 자신들만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은 힘과 능력이 있다는 얘기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그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54쪽

당은 그간의 전쟁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작전은 평양진공 작전임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의 걸림돌은 언제나 식량이었다. 만약 백제나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돌파해 식량을 운반해 준다면 어떨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고구려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대동강 하구로 진입하는 당의 수군을 엄호해줄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270쪽

의자왕이 사망하자 당은 의자왕을 낙양 북망산에 장사하고 비도 세워 주었다. 그가 묻힌 장소는 오나라의 마지막 왕 손호(손권의 손자)와 5호16국시대 남조의 마지막 왕인 진숙보의 묘 옆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부여융도 이 곳에 묻혔다. 이것은 의자왕에 대한 예유이면서 모욕이기도 한데, 손호와 진숙보는 다 망한 나라의 최후의 군주이면서 포악함과 사치와 향락으로 유명한 왕들이었기 때문이다.

311쪽

나주를 점령하지 못하는 이상 견훤은 전남의 남서지역을 장악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를 가지고 재앙이라고까지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나주의 진짜 중요성은 영산포, 즉 영산강 수로에 있다. 남해안에서 목포를 경유하여 내륙으로 들어오는 수로의 종착지이자 제일 중요한 포구가 나주의 영산포였다. 나주를 장악하지 못함으로 해서 견훤은 영산강 수로를 상실했다. 이 수로가 살아있었다면 견훤은 영산강을 이용해서 비옥한 평야지대인 전남 서남부의 병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광주로 집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전주와 마찬가지로 광주를 자신의 최대 거점으로 육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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