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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에디톨로지(2014)

독서일기/독서법창작론

by 태즈매니언 2017. 7. 2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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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을 쉽게 설명할 수 있고, 자기 주장을 어느 자리에서나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참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방송출연과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일본 교토 아라시야마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는 김정운씨는 그런 면에서 돋보이는 분이죠.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모두 재미나게 읽었기에 그가 쓰는 책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가 있었고요. 그런데 이 <에디톨로지>를 읽고 나니 제가 김정운씨를 너무 낮춰봤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비록 김정운씨가 한국에서는 교양교수였다지만 한국의 주름잡는 대학 사회과학 교수 중에서 이정도로 괜찮은 책을 펴낼만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김정운씨를 TV로만 접하신 분들은 파마머리나 나비넥타이로 희화화된 능글거리는 변태중년 아재 캐릭터에 묻힌 다른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학계 주류에게 인정받는 강단의 심리학자가 되고싶은 인정욕구를 떨쳐버린 김정운씨는 한차원 더 매력적인 아저씨가 되었네요.

이 책은 세 개의 파트로 나뉘는데 제1장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가 본 주제에 해당하고 나머지 두 개의 장은 변주격입니다. 영화에 대해 무지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왜 영화 창작의 주인이 감독인지(영화의 실체를 구성하는 편집권을 쥐고 있으니까!) 알 수 있었습니다. 화면과 화면의 편집을 통한 몽타주 기법과 화면과 음악의 편집을 통한 총체적인 에디톨로지가 영화이니까요.

전 그림에도 무지한지라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의 연원을 설명하면서 르네상스 화가들의 원근법과 소실점 화법에서 출발해서 인간 인식의 문제로 풀어나가는 제2장 앞부분을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를 통해 '왜 항상 정면에서도 보도록 그림의 소실점을 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갖는 의미를 알고 나니, 학부 다닐 때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이제야 터득한 것 같습니다.

객관적인 재현을 포기한 인상파와 시각적 재현의 근거가 되는 관점을 해체한 피카소, 자연의 대상을 기본적인 형태로 재구성한 세잔으로 이어지는 '편집'의 과정을 통해 미술 사조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요.

'장소'의 에디톨로지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요새 인테리어와 디자인에 꽂혀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달력과 지도라는 수단을 통해 시간과 공간에 질서를 부여하고 재현가능성을 획득하여 통제력을 얻은 인간의 노력, 베르사유 공전의 조경에 나타난 시선의 지배 열망, 광활한 밤하늘의 셀 수 없는 별들을 별자리로 편집, 프로이센군 작전참조의 역할과 공간편집 전문가의 위력, 상품의 분류와 전시를 체계적으로 한 백화점의 출현과 소위 '편집샵'이 갖는 매력 등등

저는 그저 소가 밭을 가는 것처럼 우직하게 읽어대는 게 낙이라 저자가 말하는 에디팅(editing)능력이 완전 꽝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편집능력이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는 있죠. 이 책을 읽으면서 페친인 임명묵님과 산타크로체님을 여러 번 떠올렸습니다. 앞으로 지식 생산자로서 세상을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지만 최소한 월급도둑은 안하려면 저도 지식편집 능력, 데이터베이스 관리, 그리고 외국어 구사능력을 갖춰야할텐데. 저도 이제 변화해야할 시기인 것 같습니다.

대학의 권력이 아날로그 시절 각주와 미주, 참고문헌을 통해 구성하는 논문이라는 텍스트 중심의 지식편집 권력에 기반했으나, 이제 마우스와 터치라는 수단과 하이퍼텍스트를 타고 널리 펼쳐진 지식폭발의 시대에는 학위 외에 그 소명을 다했다는 진단(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놀며 지식을 공유하는온라인 커뮤니티가 '컨퍼런스'나 '학술대회'하는 학자들보다 보다 거래비용이 낮은 인정투쟁이 아닐까요? ㅎㅎ)도 동의가 되더군요.

인용하고 싶은 좋은 부분들이 참 많았는데 무단 전재가 되지 않도록 중간에서 끊었습니다.(이것도 지나친 인용이긴 한데, 에디톨로지를 주창하신 김정운님께서는 너그러이 봐주시리라 믿습니다. 책도 샀으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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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쪽

'기업'도 지식이다. 기업의 각 세부 조직은 시장에 대응하는 경영자의 지식이 반영된 결과다. 조직 개편은 그 지식의 재구조화다. 같은 분야의 기업이라도 그 기업의 조직도를 보면 경영자가 시장을 파악하는 지식이 한 눈에 들어온다.

115쪽

일본 망가가 영상적 편집 방식을 만화에 도입했다고 한다면, 요즘의 예능 프로그램은 만화적 편집 방식을 TV화면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22쪽

홍상수 영화의 핵심은 매번 아주 명확하다. '밤낮으로 섹스하고 싶은 생각뿐이면서, 너무 그렇게 폼 잡지 마라!'다.

156쪽

원근법 회화에서 소실점의 위치는 화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관찰자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지점에 소실점을 맞춰야 한다고 우기는 태도는 지극히 권력적이다. 문제는 이처럼 '권력이 은폐된 소실점'을 사람들은 여전히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178쪽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냥 오르는 게 아니다. 시선을 소유하고 싶어서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그 절대적 시선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세상을 전부 소유하는 것 같은 그 시선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산에 오르는 거다.

206쪽

공식적인 자리에서 권력자와의 물리적 거리 또한 '실세'의 척도가 된다. 권력자가 암묵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허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 곁에 누가 앉느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거리뿐만이 아니다. 앉는 위치와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에 따라서도 상호작용의 내용이 달라진다.

225쪽

축구의 역동성을 좌우하는 공간 편집은 감독 고유의 영역이다. 감독의 전술이란 선수들 개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능력을 고려한 공간 편집 능력을 의미한다.

275쪽

사회적 경력, 학력을 제외하고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학력, 경력 없이도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깊은 자기성찰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명함을 내보이지 않고 자신을 얼마나 자세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서술할 수 있는가가 진정한 성공의 기준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하네요. ㅎㅎ)

329쪽

기억 왜곡은 추상적 개념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기억 편집'의 또 다른 측면이다. 기억 왜곡이 있기 때문에 추상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기억 편집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선택적 기억'을 통한 추상화와 개념화야말로 인간 문화의 본질이다.

364쪽

내 이야기가 가능하려면 사용 가능한 데이터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자유롭게 연결할 때 얻어지는 메타언어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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