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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 존스/이세영,안병률 역] 차브,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2012)

독서일기/유럽

by 태즈매니언 2017. 8. 27.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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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v’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이라는 부제를 보고서도 알쏭달쏭했던 책입니다. 'chav'는 가난한 노동계급 부류에 대한 멸칭이라네요. 1984년 셰필드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에 자랐던 영국판 러스트 벨트 출신의 노동조합 활동가 오언 존스(본인은 중간계급 출신)는 비분강개한 톤으로 노동계급이 어떻게 악마화되고 있는지 고발하고 있습니다.


조지 오웰이 1936년 탄광노동자들에 대해 쓴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현재 버전이기도 하고요. 책에 등장하는 실명을 인터넷 검색하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일부 노동계급 사람들의 고약한 생활습관과 삶의 품위, 중산층의 분별잃은 혐오는 150년 후에도 어쩜 그리 판박인지. 평균적인 노동계급이 처한 삶의 힘겨움은 영국판 <벼랑에서 선 사람들>과 <4천원 인생>이더군요. 강준만 교수님 책과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요. 또 이 책을 통해 왜 영국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 찬성이 더 높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책에 등장하는 영국 노동계급들의 목소리와 이들을 멸시하는 중산층과 상류층들의 프레임에 대한 고발을 보면서 작년에 봤던 켄 로치 감독의 품위있고 감동적이었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올랐습니다. 본지 1년이 지났지만 노동계급 시민 ‘다니엘 블레이크’의 절박한 상황과 품위를 지키려 노력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네요. 그래서 이 책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프랑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와 함께 보낸 18년의 보수당 정권 아래서 철저하게 몰락한 노동계급의 자녀들이 십대 후반이 된 모습을, 저는 1997년에 한국에서 개봉했던 <트레인스포팅>을 통해 처음 봤었습니다. 현대자동차가 약진하고 MG Rover사는 문을 닫고, 영국의 조선소들이 강력한 신흥 경쟁사 현대조선, 대우조선에 밀려 공장을 폐쇄하고 기계는 뜯겨 외국으로 팔려가던 시절부터죠.(당시 저는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읽고 있었다는 게 참 --;)


안타깝지만 저는 오언 존스처럼 영국 노동계급을 몰락시킨 원흉을 보수당 정치인으로 보는 데 동의하지 않고, 저자가 제시하는 영국 노동계급의 복원을 위한 계급정치 제안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입니다. 고풍스러운 MG Rover Mini는 지금도 갖고 싶지만 세계 시장의 소비자들은 한국의 현대자동차 엘란트라를 선택했고, 지금 런던 근방에서 가장 큰 제조업 회사 중 하나는 브롬톤 자전거회사(터무니 없는 가격, 한 세대 이전의 구식 구동계 부품, 한국 아마추어 제작자보다 못한 혁신속도를 자랑하는)인 상황입니다. 수십 년만에 자랑스런 제조업기업들이 다 무너지고 수도권에서 가장 큰 제조업 기업이 삼천리 자전거가 된 상황에서 일국적 사회복지정책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지금은 디턴이 말한 ‘위대한 탈출’이 가속화되어 국제분업의 사슬 마디마디에 붙은 수억의 인구가 극빈에서 탈출하여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삶의 질 측면에서도 지금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도 하지 못하고 있는 폴 콜리어가 말한 ‘밑바닥 10억’들의 처절한 삶과 비교할 정도는 아닌데 말이죠.


영국 노동당 정권의 공영주택공급과 이를 폐기하고, 한국식으로 공영주택 주민들 중 여력이 되는 사람을 집주인으로 만들고자 했던 대처 정권의 주택정책의 비교가 현정권의 주택정책에도 참고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실업수당과 보편의료, 박물관등 공공시설 무료 이용 등의 정책이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공짜로 인해 상품과 서비스의 질이 낮아지고, 이로 인해 세금을 많이 부담하는 중간계급의 소비만족도를 떨어뜨리고 민간보험 등으로 탈출하게 만들어 복지제도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는 과정도 생각해볼 지점을 던져주더군요. 영국이 최저임금제도를 1999년에야 도입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탄광이나 제조업같은 공유된 직업문화가 없이 호텔과 마트, 레스토랑 등지에서 파편화된 영국 노동계급의 정체성의 중심에 그나마 남아있는 펍 문화나 축구클럽 문화(부자구단주들의 돈질과 힘겹게 경쟁하고 있는 아르센 벵거느님 올해는 제발...)도 쇠락하고 있는데 이 둘마저 사라지면 ‘존경할만한’ 또는 ‘자랑스러운 가치’가 뭐가 남을지. 이러니 극우주의 정당에라도 기대게 되는 건 인지상정인 것 같네요.


주절주절 거렸지만 이런 잘난 척과 지적질은 닥치고 그냥 영국 노동계급의 삶에 공감하며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저는 이렇게 읽지 못했지만 그렇게 읽는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네요.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남의 나라이야기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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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쪽


공영주택 중 거의 절반이 인근지역 중 가장 가난한 하위 5개 지역에 위치한다. 이는 최상위 10% 중 20% 정도의 사람들이 공영주택에 거주했던 30년 전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다. (중략)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공영주택에 몰림으로써 이 단지들은 이른바 ‘차브’라는 집단과 연결되었다.


88쪽


그 정책(공영주택 거주자에게 거주기간만큼 할인된 가격으로 집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100%의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하는 정책)은 다른 누구보다도 인간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는 개인’으로 만들겠다는 대처의 결심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에 책임을 느끼도록 할 수 있었다. 대처리즘은 성공이 소유에 따라 측정된다는 새로운 문화를 촉진시켰다. 이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되었다.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일하는 인간이라는 열망은 사라졌다. 그것은 사회적 희생과는 상관없이 개인으로서 자신을 위해 더 노력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되었다.


“그들은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지만 더 이상 어쩌지 못할 사람들만 공영주택에 남겨두려고 했어요. 그들의 목적 중 하나는, 공영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사회적 부적응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든 능력이 있거나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그곳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에요.” - 공영주택보호연대 前회장 앨런 월터(125쪽에서 인용)


107쪽


소년 시절의 (데이비드) 캐머런은 버크셔의 히서타운 사립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이곳은 앤드류 왕자와 에드워드 왕자가 다녔던 초등학교다. 11세의 이른 나이에 그는 콩코드 비행기를 타고 4명의 급우들과 함께 미국에 있는 피터 게티의 생일파티에 갔는데, 피터는 석유재벌 존 폴 게티의 손자였다.


163쪽


백인 노동계급을 사회적 계층이 아니라 인종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진보 성향의 차브 혐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문제를 경제적 요인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서 기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다시 말해 차브들의 생활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불공정한 사회구조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259쪽


피오나 밀러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의 학교 아이들과 인터뷰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렇다. “아이들은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몰라요. 학교를 통해 얻는 게 뭔지 모르니까요. 부모들 역시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게 무슨 득이 될지 잘 모르니, 자녀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줄 수가 없는 거죠. 기대 자체가 꺾여버린 겁니다.” 산업 붕괴로 인한 타격이 심각한 지역일수록 더욱 그렇다.


320쪽


위어는 말한다. “우리는 싱글맘, 싱글대디들이 자주 하는 표현을 발견했는데, 바로 ‘해도 욕 먹고, 안해도 욕 먹는다.’는 거예요. 만약 당신이 일을 안하고 실업수당만 수령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게으른 식충이로 볼 테고, 당신이 일하러 나가면, 아이들이 어디 있는 지도 모른 채 그저 방치하는 부모로 볼 테니까요.” 많은 싱글맘, 싱글대디들의 구직을 방해하는 것은 그들의 의욕 부족이 아니다. 극복하기 힘든 수많은 장애물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 홀로 아이를 돌보면서, 그러니까 돌봄활동과 병행할 수 있는 적절한 일자리를 갖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위어가 말하듯 싱글맘, 싱글대디들에 대한 낙인찍기는 그들의 자존감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일자리를 갖도록 돕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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