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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묵 외]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2017)

독서일기/의학

by 태즈매니언 2017. 11. 28.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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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었던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이 10월 유신을 페어링해서 전시 공병부대의 돌관작업처럼 추진했던 산업화정책의 빛에 대한 분석이라면 오늘 다 읽은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은 그 그림자 속에 있는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은 노동자들에 대한 책입니다.


이 책을 기획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자체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정리해고가능성과 외주화의 흐름 속에서 2002. 3월 강화된 노동강도로 인해 증가한 직업병과 산업재해 대해 저항하던 대우조선 노동자 76명의 집단요양 투쟁 이후 결성된 '근골격계직업병 공동연구단'이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출범한 조직이니까요.


의료계에서 직업병으로 인한 질환을 연구하는 분과를 '직업환경의학'이라고 한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공저한 저자 14명 중 1명의 공인노무사, 노동분야 연구자 외에 다른 분들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입니다. 그렇다보니 자신들이 직접 대화하고 치료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실려있어서 연구 페이퍼보다 생생한 현장을 담고 있습니다.


한 번도 육체노동을 해본 적이 없고, 수치심이나 모욕감 등을 감내해야 하는 감정노동도 해본 적이 없었던 운이 좋은 처지에 감히 코멘트를 덧붙일 자격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노동과 의료의 현장을 전혀 모르면서 산업안전보건법 조문만 보고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일을 사람에 맞추지 않고 사람을 일에 맞춰라'고 강권하는 작업문화 속에서는 직업병은 산업의 변화에 따라 형태만 바꿔가면서 다양한 사업장에서 발생하며, 파견업(특히 제조업의 불법파견)의 경우 전통적인 직업병 판별체계로 걸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인상깊었던 부분들을 좀 길게 인용해봅니다.


p.s.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미친모자장수가 수은중독 직업병 환자였다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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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쪽


왜 많은 의사가 직업병이 아닌 개인 질환으로 판정할까. 사실 검사 결과에 큰 차이가 나타나진 않으므로 직업병과 개인 질환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상소견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물질에 충분히 노출됐다면 직업병(의심)으로 판정해야 하지만, 이 경우 개인질환이 상당수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특수건강진단기관을 선택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쪽은 사업주이기 때문에 많은 기관이 사업주의 눈치를 본다. 직업병과 개인 질환 구분이 애매한 경우에 개인 질환으로 판정이 기우는 게 현실이다.


83쪽


우리나라에서 직업병은 업무상 재해와 업무상 질병으로 나뉜다. 업무상 재해는 사고로 다쳐서 일어나고 업무상 질병은 일하는 과정에서 분진, 유기용제, 중금속 같은 유해물질 혹은 스트레스, 과로, 중량물 취급 같은 유해요인 때문에 발생한다. 이 업무상 질병에서 직업성 근골격계 질환은 약 70%를 차지한다. 근골격계 질환이 차지하는 비중이 처음부터 이렇게 많았던 건 아니다. 이 질환이 늘어난 역사는 곧 우리나라 노동자, 그리고 노동시장 변화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125쪽


사고발생 시 119에 신고하면 출동과 사고 기록이 남아 이후 노동부 산재 은폐 적발 감독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사업주는 산재 은폐를 위해 119가 아닌 회사 지정병원으로 이송하도록 하고 병원과 유착해 사고 발생 장소와 개요를 조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정병원은 소규모라 중대사고 발생 시 수술 등 응급조치 능력이 없다. 이송이나 치료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대형병원으로 옮기던 중 상태가 더욱 악화해 사망하는 경우가 다발하게 된다.


135쪽


우리 산업안전보건법은 제26조에서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는 사업주가 작업을 중지시키고 노동자를 대피시키도록 하고 있다. 노동자 역시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이을 때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하는 것이 보장된다.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대피한 노동자에게 불이익한 처우를 해서는 안된다는 규정도 있다. 하지만 법조문은 교묘하게도 작업중지권을 보장하는 때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잇을 때'로 제한하고 있다. A씨의 사업장에서 사업주가 무슨 물질인지조차 가르쳐 주지 않고 법적인 안전보건 조치를 하나도 하지 않은 채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는 이 상황은 분명 매우 위험한 상황인데, 산재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204쪽


식판 위에 올라앉은 밥과 찬을 차분히 마주하는 사람들은 그 음식이 만들어진 현장의 살풍경을 짐작하지 못한다. 20kg이 넘는 쌀가마와 밀가루 포대를 들어 옮기고, 씻고 앉히고 반죽하고 튀김옷을 입히고, 조림이며 찬거리를 대형 솥에 넣고 삽자루만한 기구로 쉼 없이 뒤집고 섞고 볶고 조려내는 과정은 마치, 모래를 치고 시멘트를 섞고 물을 부어 콘크리트를 개어 올리며 삽질이 난무하는 건설현장과 같다.


부글부글 끓는 기름 솥에 온갖 식재료를 튀겨낼 땐 불꽃 튀는 용접이나 주물 작업에서처럼 화상이 흔하다. 손목이 끊어질 듯 반복되는 채소며 육류의 칼질 도마질과 수시로 씻고 닦아내는 세척 작업은 통상적인 제조업 공정 이상의 고된 반복 작업이자 소음 노출 작업이다. 엄마의 손맛과 정성은 언감생심이다.


253쪽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유럽에선 중절모와 중산모는 모직이나 털을 압축한 펠트로 만들었는데, 이때 모자장이들은 아질산수은이 함유된 오렌지색 액체를 유연제로 사용했다. 영화에서 모자장수 역할을 맡은 배우 조니 뎁은 어눌한 말, 심한 감정기복, 손 떨림 등 수은중독자의 모습을 표현했다. '모자장이처럼 미친(mad as hatter)'이라는 관용구까지 있으니 당시 수은중독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291쪽


메탄올 중독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은 모두 불법파견노동자였다.이들 파견노동자에게 산재보상보험법상의 책임 주체인 파견 사업주는 4대 보험을 가입시키지 않았고 관리 대상 물질인 메탄올의 위험성을 알려주지도 않았다.국소 배기장치 설치는 물론 장갑,마스크,보안경 등 적절한 보호구도 지급하지 않았다.감독의 책임이 있는 노동부가 불법파견을 묵인함으로써 이들 파견노동자는 유령처럼 공단을 떠돌았고, 그들의 건강과 안전은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었다.


사고발생 이후 노동부는 임시건강진단 명령을 내렸다.하지만, 검진에 필요한 재직 및 퇴직 노동자 기록조차 찾기 어려웠다. 파견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결국,임시건강진단은 현재 재직 중인 노동자로만 국한되었다. 이전에 이 공장들을 다녀갔던 노동자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각종 유해물질과 위험한 작업환경에 노출되지만, 특수건강검진 등 각종 예방제도의 대상에서도 다수가 누락된다. 직장을 떠난 이후에 질병이 발생할 경우 직장 이력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산재보상 가능성도 낮은 것이 파견노동자의 현실이다.


303쪽


2011년 12월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당시 이 실습생은 10시간 맞교대에 잔업,주말특근까지 하며 짧게는 주당 58시간,길게는 7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하던 중이었다.사고 후 실태 조사에 참여했던 한 특성화고 교사는 "대기업도 그렇게 현장실습생을 착취하다니 정말 놀랐다.가을부터 2월까지는 특성화고 학생을,1학기 때는 전문대 실습생을 쓰니 1년 동안 신규 노동자를 한 명도 채용하지 않고 잘 굴러가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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