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레이먼드 카버/최용준 역]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2000)

독서일기/북미소설

by 태즈매니언 2018. 2. 9. 15:58

본문

 

예전에 노무현정부 때 장관이었던 어떤 분이 만든 재단법인의 개소식 모임에서 이창동 감독님을 봤었다. 아마 참여정부OB라는 친분 때문에 오셨던 것 같다. 당연히 누굴 통해 소개받을 사이도 아니다보니 그 곳에 머무르던 시간 내내 감독님 주변을 어정거리면서 안보는 척 흘낏거렸던 기억이 난다.

 

의외의 팬심이긴 한데 이창동님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국어교사로 일하던 시절 쓰셨던 소설들 중에 <녹천에는 똥이 많다>라는 단편을 한 권 읽었는데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고달픈 30대 직장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했다고 느낀 기억이 남아있다. 그 분이 노무현정부 시절 문체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취임식을 따로 안하고, 홈페이지에 취임사만 올리고, 본인이 직접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하고 다녔던 이야기, 수행비서인 사무관이 자기가 출근할 때 문을 열어주자 못하게 했던 이야기(심지어 당시에 관용차도 안타고 자기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함) 등도 내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 날 그렇게 기웃거리다가 유일하게 훔쳐들은 그 분의 말이 “레이먼드 카버가...”라는 한 마디였다. 근래에 페북을 통해 알게 된 안목높은 독서가들을 통해서 레이먼드 카버가 미국의 소설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단행본 미수록 단편, 유고 원고, 에세이 등을 모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레이먼드 카버의 글을 읽게 되었다.

 

표제작인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외의 다른 단편들은 뭐가 훌륭한거지? 싶었다. 레이먼드 카버가 쓴 서문이나 서평들까지 긁어 모아서 뒷부분에 붙인 것도 난삽해보였고.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카버의 메시지들은 꽉 쥔 주먹으로 후려치는 훅처럼 묵직했다. 꼭 글쓰기에 한정되지 않는 인간과 일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었다. 그 중에서도 빨래방에서의 체험에 대한 썰이 압권이었고.

 

읽으면서 주변사람들 중에 8학년 학교를 다닌 친지들이 거의 없고, 스무 살쯤에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며 벌목공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해온 블루칼라 출신인 카버가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 나처럼 치열한 구석이 없고 도전을 피하는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책을 덮고 나니 이창동 감독이 왜 그 날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내러티브의 힘을 중시하는 사실주의적인 글과 영상을 만드는 분이니 자신과 동류(同流)인 작가를 좋아할 수밖에. 나중에 기회가 되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들을 좀 찾아 읽어봐야지. 그가 추천하는 체홉의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고.

 

---------------------

 

164쪽

 

(소설 창작에서)‘실험’은 부주의함과 멍청함 또는 모방의 허가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잦다.

 

166쪽

 

에번 코넬이 말하길, 단편을 쓰고 나서 다시 읽으며 쉼표를 모두 제거하고, 그다음에 다시 읽어보며 쉼표를 넣었을 때 같은 자리에 쉼표들이 들어가면 글이 완성된 거라고 했다.

 

167쪽

 

만약 더 잘 쓸 수 있음에도 그렇게 쓰지 않았다면, 애초에 왜 쓴단 말인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과 그 노동의 증거가 아닌가.

 

186쪽

 

내가 볼 때, 장편소설을 쓰려면 작가는 그 자체로 이치에 맞는 세상을, 작가가 믿을 수 있고 완전히 이해하고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야만 한다. 적어도 한동안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세상 말이다. 이와 더불어, 그 세계가 본질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작가가 아는 그 세계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며 그에 대해 쓸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아야만 한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