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에런라이크/전미영 역] 긍정의 배신(2009)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세포생물학 박사였다니 의외다. 난 아직 못 읽어본 그녀의 첫 저서 <노동의 배신(Nickel and Dimed)>의 소개글을 보면 3년 동안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해온 워킹푸어 생존기라고 되어 있길래 사회과학쪽이나 기자출신인줄 알았는데.

 

애런라이크 자신이 2000년의 유방암 발병으로 인한 치료 과정에서 겪었던 긍정주의의 세례에 대한 불편함이 책을 쓰게 된 단초가 되었다는데 그녀가 이공계 박사출신이라는 사실도 좋은 질문을 던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빅터 프랑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아툴 가완디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Complicated)>,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를 인상깊게 읽고 나서 이 책을 만나니 페이지가 아주 술술 넘어간다. <남자의 종말>을 썼던 해나 로진이 뉴욕 타임스에 남긴 한 줄 서평 "누군가 이런 책을 써 주길 평생 기다렸다."에 고개를 끄덕이며 따봉 백 개 얹고 싶을 정도로. 말미의 긴 맺은말 챕터를 볼 때는 깊은 감동에 자못 경건해질 지경이었다.

 

베스트셀러 <더 시크릿>에 나오는 끌어당김의 법칙, 동기유발 산업과 영적 코치들, 긍정신학과 기업을 닮아가는 교회, 긍정심리학 등을 돌아가며 까주는데 시원시원하다. 마지막 7장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경제를 무너뜨렸나'만 좀 보류. 이 문제는 광기-패닉-붕괴로 이어지는 금융위기의 사이클과도 관계있는 문제라 경제분야의 긍정적 사고가 문제였다고 20페이지 내외로 짧게 단정할만 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긍정신학 목회자들과 대형교회의 마케팅에 대한 애런라이크의 분석은 한국의 대형교회와 목사들에도 고스란히 대입되는 내용이라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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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쪽

 

코칭 업계와 <시크릿>같은 책에서 볼 수 있는 형이상학은 전통적인 주술 기법, 특히 '공감주술(sympathetic magic)'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공감주술은 끌어당김과 같은 원리로 작용하는데, 주물이나 부족(흑마술에서는 바늘이 꽂힌 부두 인형)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간주된다. 긍정적 사고에서는 원하는 결과의 이미지가 정신을 집중시키는 내면의 부적이 된다.

 

168쪽

 

쫓겨난 사람들의 악감정을 다독여 부당 해고 소소엥 휘말리거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기업은 재취업 알선 업체의 힘을 빌린다. 이런 업체들은 이력서 작성법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 동기 유발 서비스로 해고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역할도 맡는다.
(굴지의 조선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다룬 2010년도 영화 <컴퍼니 맨>에서 잘 묘사하고 있더군요.)

 

198쪽

 

교회가 들어설 예정지에서 조사를 실시한 목사들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오락(예컨대 록 음악이나 그와 비슷한 음악)임을 알게 되었다. 또 이혼, 약물중독, 10대 자녀의 문제 등에 관한 지원 및 어린이집 같은 서비스를 원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중략) 요즘의 초대형 교회들은 소비자의 욕구에 발맞추기 위해 취학적 교육과 방과 후 교육, 스포츠, 10대 활동, 갱생 프로그램, 취업지원, 건강박람회, 매 맞는 여성 및 이혼한 사람들을 위한 지원 그룹 등을 제공하는 종합 서비스 센터로 변모했고, 에어로빅이나 근력 키우기 강좌까지 연다. 미국 교회들은 복지 혜택이 충분한 국가에서라면 세속적인 사회복지 당국이 해야 할 사업을 대신하고 있다.

 

271쪽

 

지금까지 이루어진 인류의 지적 진보는 우리가 사물을 자기 감정의 투사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파악하려 했던 오랜 투쟁의 결과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그것은 이 세계가 인간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인과관계, 개연성, 우연이라는 자체의 알고리즘에 의해 전개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는 과정이다.
(제발 활자기근에 시달리는 불쌍한 군인들에게 <좋은 생각(positive thinking)> 보급 좀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