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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터친/윤길순] 제국의 탄생(2006)

독서일기/거대담론

by 태즈매니언 2018. 6. 1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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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들께서 강추하실 때 이 책을 샀어야 했는데 사놓고 못읽고 있는 책들이 많다고 미적거리는 사이에 품절. 다행히 추천해주신 임아이돌님 덕분에 빌려 읽음. 올해의 책 열 권 중 한 자리가 채워진 듯 싶다.

피터 터친은 퍼트남과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사회적 자본'이라는 훨씬 친숙한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동역학'의 주창자 답게 14세기에 살았던 이븐 할둔이 말한 '아사비야(집단의 구성원들이 하나로 뭉치는 능력, 협력하는 능력)'라고 하는 개념과 문명의 단층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초민족 공동체인 제국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리고 왜 세대별로 부침을 겪고, 결국 몰랐하게 되는지, 몰락한 제국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다른 제국은 어떻게 등장하는지에 설명한다.

150명(던바의 수)이라는 사회적 채널 용량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사회집단을 나타내는 상징의 발명(ex토템)'이 갖는 중요성. 평등성과 손쉬운 사회적 계층이동, 그리고 공정성 규범의 엄격함과 같은 변경사회의 특성이 어떻게 집단의 장기적인 성공에 기여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재미난 착상에 다른 학자들의 아이디어를 인용해서 이언 모리스 교수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통일장 이론을 펴나간다.

근데 내용도 방대하고 이에 대해 임명묵님이 훌륭한 서평을 남겼기 때문에 내가 그에 대한 열화버전을 쓰는 건 의미가 없다...(이거 보시면 댓글로 서평 링크 좀 달아주세요.)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시대 남한에 사는 하급 젠트리의 시선에서 피터 터친의 역사동역학(Cliodynamics) 이론을 적용해봤다. 남한이 초민족공동체인 제국은 아니지만.

남한은 지난 한 세기 동안 해양세력인 일본제국의 지배(반일과 극일의 아사비야 땔감을 남김 ㅋㅋ)와 미군의 진주를 통해 공산주의자들과 휴전선을 두고 대치하면서 집단 선택의 압력이 거센 문명의 단층선이자 변경이었다. 여기서 유전학의 돌연변이나 재조합과 유사해보이는 문화적 진화(속도*5)를 통해 지상목표였던 생존은 물론 세계사적으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북한이란 경쟁자때문에 취해졌던 상대적으로 소작인들에게 유리했던 토지재분배, 한국전쟁으로 인한 계급타파와 경제적 평등의 성취, 독재자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매판자본을 길들이고, 수출기율을 강제하여 빈곤한 국민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여 전근대 국가에서의 영토확장과 같은 효과를 봤다. 엄청나게 높은 '아사비야'가 큰 몫을 했고.

카톨릭계 남부 저지대가 벨기에로 떨어져 나간 네덜란드처럼 위아래로 긴 반도국가에서 정복할 땅을 신경쓸 일이 전혀 없는 단괴형 국가가 된 게 오히려 축복이었던 측면도 있었다고 봅니다.(그래도 지역감정이 있었지만요.) 게다가 박정희는 냉전시대 덕분에 우방국에 수출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공동체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과시적 소비를 할만한 물건들은 최대한 수입을 틀어막거나 높은 관세와 개별특소세를 부과했죠.

IMF위기 이후로 지금까지 남한엘리트의 선택과 행운은 탁월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이 높아지고, 소수의 코스모폴리턴과 개돼지들로 분화된 남한이라는 민족공동체의 '아사비야'는 이미 2000년대 초반 이후로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피터 터친도 로마제국의 사례를 들어 이런 시차가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과의 평화체제에 찬성하면서도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섣부르게 느껴집니다. 아예 섬나라인 일본과 달리 일시적인 섬나라였던 상황이 높은 '아사비야'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이는데 과연 남한의 기초생활수급대상자들, 차상위계층, 장애인과 시골의 독거노인들이 통일을 반길까요?

그리고 자녀들을 계속 엘리트집단에 남게 하기 위한 교육이라는 군비경쟁이 격화되는 게 전세계적인 추세라지만 한국은 엘리트층 내부의 경쟁이 너무도 심해서 그나마 남아있는 사회적 자본을 말해주는 공동체의 유대들이 과연 다음 세대에서는 얼마나 남아있을지 의문입니다. 지금의 한 자녀 낳기 추세는 어찌보면 한 가구가 겨우 먹고살만한 자경농지가 상속을 통해 반으로 쪼개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자영농 가구들의 생존전략인 것도 같고요. ㅎㅎ

중세 프랑스사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인용하는 내용들을 보다보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하이스패로우가 14~15세기 프랑스의 민중 선동가 에티엔 마르셀과 시몽 카보슈의 사례에서 따왔고, 볼튼 가문은 희생자들의 가죽을 홀딱 벗기는 '에코르셰르(ecorcheurs)'란 집단을 참고한듯 싶어서 재미있었습니다. 근데 문명의 단층선과 변경을 다루면서 위대한 '예케 몽골 울루스'에 대해서 이렇게 조금밖에 안다루다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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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집단만이 다른 집단과 사회 전체를 억압할 수 있고, 그러려면 '억압자'집단이 내적으로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억압은 협력을 토대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65쪽

협력과 무자비함 사이에는 본래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대량 학살과 같은 대규모의 무자비한 행위는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나 현대 사회에서나 오로지 내적으로 결속된 집단만이 저지를 수 있었다.

361쪽 : 묵시록의 네 기사가 가져오는 순환

우리는 지금까지 강한 제국은 안정과 내부 평화를 가져오지만 그 안에 혼란을 낳을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안정과 내부 평화는 번영을 가져오고, 번영은 인구 증가를 낳는다. 인구 증가는 인구 과잉을 낳고, 인구 과잉은 임금 하락과 지대 상승, 평민들의 1인당 소득의 감소를 가져온다. 처음에는 낮은 임금과 높은 지대가 상류층에 유례없는 부를 가져다주지만, 그들의 수가 증가하고 탐욕이 늘면 그들도 소득 감소를 겪기 시작한다. 생활수준의 하락은 불만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엘리트층은 국가에 의지해 고용과 추가 수입을 얻으려고 해 국가의 지출을 끌어올리지만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빈곤해져 세수는 줄어든다. 국가의 재정이 붕괴되면, 국가가 군대와 경찰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면 모든 제약에서 풀려나 엘리트층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일어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해 민중 반란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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