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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산 게이/노지양 역] 헝거(2017)

독서일기/젠더

by 태즈매니언 2018. 9. 14.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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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그런 편이었지만 최근 몇년간 내 독서취향이 5~60대 백인남자가 쓴 글쪽으로 많이 치우치긴 했다. 김애란의 소설이나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말고는 여성적인 글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별로 없고. 그래서 어느 페친님 담벼락에서 서평을 봤던 책을 업어왔다.

<Hunger : A Memoir of (My) Body>. 참 멋진 제목인데 책을 읽고난 지금 열광과는 거리가 먼 격렬한 감정때문에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다. 

그냥 마음에 안들면 별로네~하고 마는데, 왜 이렇게 고구마 잔뜩 먹다 얹힌 것같은 불쾌한 답답함이 밀려오는지. 미친 꼴마초라고 손가락질 받을지 몰라도 자기 변명에 능란한 징징이 끝판대장을 만난 기분이다. 현실에서 절대 말 한 마디 섞고 싶지 않은...

자기 치유를 위해서라도 록산 게이에겐 꼭 필요한 글쓰기였다. 그녀의 토로를 통해 BMI가 50이 훌쩍 넘는 초고도 비만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접해볼 수도 있었고. 

하지만 그녀의 과한 자기애와 바닥을 지나쳐 지하 5층까지 굴을 파는 낮은 자존감에 읽는 사람까지 마음이 무거워지더라. 끊임없이 자해를 하면서 자기 몸을 영혼의 감옥처럼 학대하며 구도하는 종교인을 보는 것 같은 답답함에 읽으면서 욕지기가 나왔던 부분이 많았다.

록산 게이가 주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내던지며 '스스로 보호받는 느낌'에 취하는 패턴들도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녀는 당연히 조언 따위 필요없다고 밀쳐내겠지. 하지만, 그녀가 내 가까운 사람이었다면 그 뛰어난 상상력으로 온갖 사건을 복기하며, 불쌍한 자기 자신을 소가 여물 우물거리듯 곱씹는 일을 멈추고자 했을테다. '수치심이 뭐임? 먹는거임?' 차라리 가족들을 만나지 말고, 의학과 심리학적 치료가 필요한 섭식 장애를 인정하라고, 제발 자존감을 회복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갖지 못한 여러 방면의 재능을 갖고 있었던 예전 친구가 있다. 남들의 무신경한 말 한마디나 결코 그에 대한 적의를 담은 건 아니었던 불편한 행동 하나에도 며칠을 고통받던 예민한 감성의 예술가. 지금도 겨울외투를 입은 채로 벌렁 누워 우울함의 늪을 부유하고 있는 그의 만사 귀찮은 표정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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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쪽

내게 어떤 끔찍한 일이 생겼다.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하고 덮어버리고 싶은데 나는 작가이지만 여자이기도 하기에 내게 일어난 그 최악의 일로 나라는 사람이 정의되길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인격이 그런 방식으로 소비되기를 원치 않는다. 내 작품 또한 그 끔찍한 일 하나를 바탕으로 소비되거나 해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침묵하고 싶지 않다. 침묵할 수가 없다. 금찍한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척하고 싶지 않다. 내가 짊어지고 다니던 그 모든 비밀을 더 이상 나 혼자 짊어지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세월을 그렇게 해왔고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다. 

내가 내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면 내 언어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관심에 개의치 않고 내 식대로 하고 싶다. 동정이나 공감이나 조언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용감하지도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다. 나는 강인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다. 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여성이 경험한 것을 경험한 한 여성일 뿐이다. 

231쪽

내 인생에서 가장 환희에 넘치던 행복한 순간까지도 언제나 나는 이 나의 몸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있고 내 몸이 어딘가 맞지 않아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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