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승태] 인간의 조건(2012)

독서일기/에세이(한국)

by 태즈매니언 2019. 1. 13. 01:39

본문

 

올해 처음 만난 압도적인 책.

 

저자 한승태님이 어업(진도 꽃게잡이 배 선원), 농업(춘천 비닐하우스 일꾼), 축산업(아산 돼지농장 똥꾼), 제조업(당진 자동차부품공장), 서비스업(서울 편의점과 주유소)에서 일했던 경험들을 기록한 책이다.

 

지금과 10년 이상의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한국 사회의 일터에서 벌어졌던 일들이고, 현민님의 <감옥의 몽상>을 읽을 때처럼 섬세한 신경을 가진 저자의 기록이 구체적이고 세밀하다보니 읽으면서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꽃게잡이 배 선원 시절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순서상 두 번째로 경험했던 직업인 편의점 점원 시절의 최저임금이 시간당 3,700원으로 나오다. 3,700원이면 1986년 말일에 <최저임금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면서 최초로 최저임금이 공표되고 적용되었던 1988년의 최저임금이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당진의 공장에서 일할 때의 최저임금이 시간당 4,110원인데 이 금액은 2010년의 최저임금이었다.

 

2012년에 나온 이 책이지만 던지는 의미는 현재적이다. 오히려 이 시기에 맹렬하게 불꽃을 내뿜는다. 현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의 개념은 모호하지만, 명확한 사실은 2018년 최저임금은 전년 대비 16.4%가 올랐고, 올해는 10.9% 인상된 8시급 8,350(40시간 만근시 월급으로 1745,5150)이고, 이러한 급격한 인상 속도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팽팽히 갈린다는 점이다.

 

30년째 최저임금을 주고 있다는 사장님을 폄하하는 발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스스로 누군가를 한 명이라도 고용해서 임금을 지급해본 경험도 없는 사람은 섣불리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최저임금도 지급하지 않거나 딱 최저임금만 지급하면서 근로조건은 적발되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무더기 행정처분을 받을 정도인 마트에서 수박 고를 때보다 구직자를 건성으로 보고 당일 채용하는 사업장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저자 한승태님이 겪었던 이런 사업자들은 최근 2년 동안 올라간 최저임금을 맞춰주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도 물론 늘어날테고 이왕 법을 위반하는 거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사용하는 사업장이 증가하겠지.

 

내 경제학 개론 수준의 지식으로 예상하면 최저임금을 주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일자리에서 배제되는 한계 근로자 가구들은 기초생활수급자 가구가 되어,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현금을 받으며 법외 일용노동자로 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고 나니 정책입안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의 높은 최저임금 인상을 적어도 임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할 때 기본적인 근로조건을 보장하고 인권을 존중한다는 헌법상의 요구를 무감각하게 생각하는 영세 고용주들의 낙후된 인식을 깨기 위한 충격요법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헌법상의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은 일터에서는 노무를 제공하지 말라는 뜻이니.

 

그리고, 어차피 인상된 최저임금으로 고용해야 하면 근속기간을 늘려서 잦은 이직으로 인한 사용자와 노동자의 손실을 줄이려는 인센티브가 생길 것이다. 문화는 천천히 바뀌지만 돈이 결부되면 생각보다 빨리 바뀌니.

 

꼭 이런 충격요법이 필요한지는 지금의 꽃게잡이배 선원이나 돼지농장 똥꾼에 대한 근로조건과 대우를 알 수 없어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아래에 인용을 많이 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꼭 이 책을 읽었으면, 혹시 책을 못읽으면 같이 봤으면 하는 문장들이 훨씬 많아서 추려내기 힘들었다. 작업방식과 작업장,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의 시설과 환경에 대한 묘사들은 일종의 포르노 같아서 옮기지 않는다.

 

--------------------------------------

 

83

 

항구에서는 모든 사람의 삶이 하향 평준화된 사회가 주는 만족감이 있었다. 모두가 헌 추리닝을 입고 형편없는 식사를 하고 매일같이 위험하고 힘들게 일했다. 볼품없는 외모를 주눅 들게 만드는 예쁜 여자도 없었다. 누구도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거기엔 실패를 받아들인 데서 오는 편안함도 있었던 것 같다.

 

205

 

우리는 충고라는 사치를 만끽하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부터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좋은 충고란 자신과 이웃에게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뿐이다. 누군가에게 충고를 건네고 싶다면 상대방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생각하는지부터 알아볼 일이다. 만약 당신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충고할 자격이 없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도 상대가 당신을 좋은 충고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두 사람은 충고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것이다.

 

299

 

일주일 정도 지나자 왜 농장주들이 유달리 유경험자를 선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농사가 특별히 힘들거나 더러워서가 아니다. 이들이 원하는 유경험자는 작업의 유경험자라기보다는 생활의 유경험자다. 농촌 생활의 황량함과 고독감을 견뎌본 사람 말이다. 일은 할 수 있지만 작업장에 있을 수 없다면 방법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365

 

아저씨들은 입버릇처럼 그래도 힘들 땐 한국 사람밖에 없어하며 서로를 위로했지만 바로 그 힘든 시기, 즉 낮은 보수, 긴 작업 시간, 위험한 작업 환경을 제공하는 그 사람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모두 편리하게 잊어버렸다.

 

388

 

많은 사람들이 젊은 친구들이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면서 돈만 밝힌다고 투덜댔다. 이런 평가는 공정하지 못한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힘들고 돈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작업장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닌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어느 누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왜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힘들고 위험하고 보수도 적은 일을 참고 버티는 게 당연하다고 믿는 걸까? 누군가 그런 일을 그만둔다면 그건 그들이 참을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현명하고 이성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389

 

F사처럼 직원들을 몰아세우고 윽박지르는 건 회사의 이익을 단기로만, 일주일, 한 달 단위 정도로 계산했을 때만 유용한 방식이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숙련공이 많을수록 회사에 도움이 된다는 건 자명한 이치였지만 회사는 숙련공이 될 싹을 자르는 데 더 열심인 것 같았다. 덕분에 가공팀은 언제나 인원이 부족했고 항상 납품 기한에 뒤처졌다. 신입 사원들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기존 직원들의 작업 속도도 느려졌다. 새 직원들을 교육해야 했기 때문이다.

 

437

 

나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비밀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이 괴상망측한 사회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