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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2018)

독서일기/에세이(한국)

by 태즈매니언 2019. 3. 1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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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에 질려버린 터라 읽어야할지 머뭇거렸다. 아마 저자가 나와 같은 학과를 나온 현직 변호사가 아니었다면 구매할 일이 없었을 거다. 다행히 사회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특수학교의 장애인 친구들과 서울대 학부와 같은 로스쿨의 '매력자본'이 넘치는 동기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온 저자의 경험과 엄밀한 사고 실험이 녹아있는 좋은 책이었다.

 

우리나라 등록장애인의 90%는 후천적 장애인이다. 즉 지금 나는 장애인이 아니지만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병역거부를 하고 실형을 살았던 현민씨의 <감옥의 몽상>과 비슷한 느낌의 책이었는데도, 와닿는 느낌은 이 책이 훨씬 격렬했다. 그래서 내 올해의 책 후보작으로 올려본다. 특히 마지막 두 페이지를 이루는 단어들과 문장들은 변호인의 최후변론으로 모범으로 삼을만한 문장이었다. 


앞서 말한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의 밑바닥까지 가는 사고 실험을 전개하지만 비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고, 강요받는다는 느낌도 없이 읽었다. 법률적인 주장과 입증방법으로 채운 서면이 아니지만 호소력이라는 측면에서 훌륭한 변론이었다. 인간을 한계가 많은 대단치 않은 동물로 생각하는 내게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주장들이었지만 그렇기에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내 업무와 관련해서도 2005. 1. 27.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정과 배리어프리(barrier-free)정책을 이끌어 낸 2000년대 장애인 이동권 운동에 대해서 알게된 점도 귀중했다.

 

저자가 살아온 이력과 스펙을 재료로 해서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오체불만족>과 같은 책을 기획했으면 판매량은 훨씬 더 많았겠지만 이렇게 한국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잘 안팔릴 것이 뻔한 책을 출판해준 '사계절 출판사'에도 감탄했고.

 

이 책에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아래의 법률신문 기사를 보시면 좋습니다.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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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쪽

 

타인에게 아무런 매력도 보이지 못하는 사람은 도덕과 법규범에 의지해 일정한 존중은 받을 수 있지만, 진정으로 타인과 깊숙이 연결될 기회를 같기는 어렵다. 인간은 모두 아름다움에 취약하다. 생생한 개인이라고 다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헌법과 법률이 차별을 금지하고,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확산되어도 매력 없는 구성원은 비공식적인 사적 네트워크 안에서 타인과 교감하고, 성적 관계를 맺고, 장기적인 우정을 나누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우리에게는 각자가 가진 생생한 고유성과 숨겨진 '아름다움'을 전개할 무대와 관객이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무대가 설계되어 진지한 관심을 가진 관객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훨신 깊은 존중을 받으며 매력적인 관계로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임을 보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주요한 사례로 언급하는 이들은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늘 경험하고 공부하고 투쟁해온 영역이기에 가장 진실에 부합하게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44쪽

 

인간은 신체를 훼손당할 때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개인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 특유의 욕망과 선호, 희망, 자율성으로 구성되는 개별적 인격성을 인정받지 못할 때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당한다. 장애, 질병, 빈곤 등으로 도움이 필요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단으로 삼아 철저히 익명화(기호화)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공연은 결국 이들을 실격당한 존재로 만든다.

 

49쪽

 

모욕의 순간을 자주 경험해야 했던 사람은 그런 상황에 노련해질수록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일치하는 경험에서 멀어진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쌓는 일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어떤 '타자'에게 온전히 몰입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분노 혹은 감동하거나, 특정한 현실에 완벽하게 실재하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67쪽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모르는 척해주는 익명의 대학생이 고마워서 그를 존중하며, 자신을 존중하려 애쓰는 자폐아 부모의 노력을 아는 대학생은 더더욱 무심한 척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124쪽

 

스타일의 추구는 자신을 '무엇이 아님'이라는 결여가 아니라 '무엇임'이라고 적극적(positive)으로 규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무엇이 '아닌 것'이라는 소극적 형태로는 그와 같은 스타일 만들기가 불가능하다. 내가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함께 휠체어의 디자인을 고민하고, 그것을 우리 몸에 맞게 조율하며 허세를 부릴 때, 우리는 분명 '정상성의 결여'로서 '나'를 인식하지 않았다.

 

166쪽

 

2015년 기준 우리나라의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 입원해있는 사람은 8만 1,105명이며, 이 가운데 5만 5,041명이 강제로 입원해 있다. 같은 해 기준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 수(5만 5.123명)보다 정신병원과 요양시설에 입원한 사람이 더 많다.

 

230쪽

 

이동권 투쟁의 역사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는, 장애인이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위 과정 자체가 장애인을 자꾸 이동시켰다는 점이다.

(중략)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인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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