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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2018)

독서일기/농림축산

by 태즈매니언 2019. 5. 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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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들어진 표지도 눈에 들어오지만 '한승태 노동에세이'라는 여덟 개의 글자만으로도 꼭 읽어야겠다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출판된지 1년 만에 보게 되었다. <인간의 조건>이 워낙 압도적이었지만 초고를 쓸 때와 내가 읽었던 작년과의 시간적 간격이 크다보니 옛날 무용담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로 태어나서>는 길어야 5년 전의 양계장, 양돈장, 개사육장 이야기라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책에서 다루는 노동의 범위도 아래의 근로기준법 제63조 제2항의 축산업 중에서 각자 특징이 있는 세 가지 동물 기르는 환경과 노동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어 한결 짜임새가 있다. 나의 올해의 책 후보작이다.

 

근로기준법 제63조(적용의 제외) 이 장과 제5장에서 정한 근로시간, 휴게와 휴일에 관한 규정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근로자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1. 토지의 경작ㆍ개간, 식물의 재식(栽植)ㆍ재배ㆍ채취 사업, 그 밖의 농림 사업
2. 동물의 사육, 수산 동식물의 채포(採捕)ㆍ양식 사업, 그 밖의 축산, 양잠, 수산 사업

통계청 자료를 보니 소위 1차 산업인 농립축산어업이 우리나라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7년 기준으로 2.16%에 불과하다. 농립어업 사업체 종사자 숫자도 비율로 다루는 게 의미없을 정도인 4만 4천 명에 불과하고 그나마 상시 근로자가 300명 이상인 사업체는 단 한 곳도 없다고 나와서 내가 제대로 확인한 게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출처: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K52B03)

 

즉, 농축산어업에 종사하는 부모를 둔 농어촌 마을 출신이 아닌 대부분의 젊은 한국인들은 농림축산어업 현장의 환경과 노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대부분 연로한 어르신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고 있으니까). 최저임금을 받으며 레스토랑이나 까페에 가려면 차로 30분 이상 가야하는 샌드위치 판넬 숙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기거하면서 양계장, 양돈장, 개사육장에서 일할 젊은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굳이 축산업에 종사할 계획이 없더라도 한승태님의 체험담을 경청할만 하다.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상 매일 같이 먹고 있는 고기와 달걀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있는지, 그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현실은 어떤지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세상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같은 경우는 어릴 때부터 개고기를 먹다보니 종종 보신탕을 먹었는데, 이 책을 통해 개사육장의 현실을 알고 나니 앞으로는 못먹을 것 같다.

 

식당, 학교, 호텔에서 나오는 많은 양의 잔반들(소위 '짬'이라 불리는)이 일부 영세한 양돈장(그나마 최근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아프리카 돼지열병때문에 5월 중에 폐기물 관리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 앞으로 잔반돼지 사육은 금지된다고 함) 외에 거의 대부분 개사육장에서 소비되고 있는 상황이고,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잔반처리 비용이 절감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처음 알았다.

 

내가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이긴 하지만 저자가 일했던 곳에서 키워진 가축들을 떠올려보면 가축들을 인간과의 공진화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번성해온 진화전략의 산물이라고 찬탄할 수가 없구나. (사육장의 환경은 모두 다르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되는 닭과 돼지, 개들의 고통, 그리고 근로기준법도 거의 적용되지 않는 고립된 섬과 같은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됨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번갈아 가며 머리 속을 울렸다. 하필 근로자의 날을 유급휴일로 인정하는 직장에 다니는 덕분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씁쓸한 뒷맛도 스쳐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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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쪽

 

닭과 돼지는 가장 대표적인 고기라서, 개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보여준다고 판단해서 선택했다. 식용 동물의 삶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할 수 있다고 한다. 사육, 수송, 도살. 이 책은 그 가운데 사육, 즉 동물이 태어나서 도축장으로 보내지기 직전까지의 과정만을 다룬다. 이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과정도 (또 다른 식용 동물도) 직접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게 내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11쪽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어떤 목표를 꿈꿔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맛있는 먹을거리뿐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 역시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식 자리에서 육즙이 흐르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다.

 

19쪽

 

만약 내가 이 닭들에 대해서 책으로 읽었다면,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내 눈앞에 있었고 너무나도 역겨워 보였기 때문에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케이지란 도구는 갇힌 쪽이나 가둔 쪽 모두에게서 최악의 자질을 이끌어 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37쪽

 

공장식 농장의 암탉 1년간 낳는 달걀의 껍질로 가는 칼슘의 양은 암탉 뼈 무게의 30배나 된다. 이 때문에 산란계들은 만성적인 칼슘 결핍에 시달리고 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닭에게도 골다공증을 일으킨다.

 

88쪽

 

수백 마리일 때는 병아리들이 지나가는 거지만 수천 마리일 때는 삑삑대는 인형들이 지나가는 거고 수만 마리일 때는 노란 털 뭉치들이 지나갈 뿐이다. 컨베이어 벨트에는 어떤 감정이건 그것이 얼마나 강렬했건 순식간에 무뎌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230쪽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을 때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 때다. 스스로에 대한 환성과 인생에 품은 터무니없는 기대가 증발하고 나서야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402쪽

 

개들이 짖기 시작하면 공기로 얻어맞는 기분이 드는 게 장풍이 이런 건가 싶었다. 개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동시에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벗어나면 너무 편안했다.

 

404쪽

 

"개고기 못 먹게 해봐. 음식 쓰레기만 문제야? 농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많은 식당들 문 닫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실업자 되면 나라에서 감당할 수 있어? 지들도 그걸 생각해보니까 골치 아프거든.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두는 거야."

 

440쪽

 

"그러니까 사람들이 가만 보면 참 치사한 거야. 음식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돈 많이 드는 건 싫지만 그걸 개한테 먹이는 것도 싫다. 이게 앞뒤가 안 맞잖아? 금지할 테면 하라고 해봐. 한 달도 안 돼서 다시 개한테 먹이라고 사정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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