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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엽] 조용한 혁명(2016)

독서일기/일본

by 태즈매니언 2019. 8. 1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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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벽돌책을 읽은 기억이 없어서 휴가를 맞아 집어 들었다. 참고문헌과 색인까지 합치면 800페이지가 넘는 하드커버다보니 손목으로 받쳐들고 읽기 버겁다. 물리적 무게만 아니라 담고있는 내용의 깊이도 마찬가지였고.

 

집필에만 5년, 수정 및 교정에 1년 8개월이 걸렸는데 책에서 다룬 역사의 현장에 저자가 직접 다녀온 흔적들이 문장과 사진 곳곳에 남아있다.

 

요즘같은 시국에 굳이 일본의 '자주독립'과 '천황제 통일국가 수립'의 과정에 대한 책을 찾아본 이유는 쇼와시대와 대비되는 유신과 건국 과정에서 주요 플레이어들의 유연한 사고방식을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에도시대의 번영으로 인한 국학의 형성과 양학의 도입, 교육기관의 확대, 페리 함대의 등장과 러시아의 위협 등의 환경에서 지배계급의 자기 혁신을 이뤄낸 성취는 누구나 벤치마킹하고싶은 사례가 아닐까?

 

저자가 정통 학자가 아니라 부산광역시와 기재부에서 일했던 공무원이었다는 점이 의외였는데, 공무원, 특히 기재부에서 일했던 경험이 자신의 전공인 일본 근대사 전반을 아우르는 거대한 주제인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건국'에 대한 단행본을 쓸 수 있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아내 분이 일본인으로 일본어 서지들을 정리해주셨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부산 남구 공천을 신청했다가 현역 의원에 밀려났던 개인적인 상황 등도 깊이있는 역작이 나오는데 영항을 미친 것 같고.

 

이 책을 통해서 에도시대 후기인 18세기부터 1889년 대일본 제국헌법 공포와 1890년 의회 개설, 1872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예비 교섭노력부터 40년에 걸친 노력 끝에 성취한 1911년 일미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여 국가건설과 자주독립을 성취해낸 장대한 과정을 차분히 짚어볼 수 있었다. 구한말의 역사적 기억때문에 메이지 유신에 대해 알기를 회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일본이 겪어냈던 과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국인일텐데.

 

그리고, 천황과 막부를 위해 헌신해왔는데도 불구하고, 고메이 천황 사후, 유신세력과 막부 모두에게서 버려진 비운의 옛 아이즈번(지금의 후쿠시마 현 서부)의 와카마쓰성과 미토학의 본산인 미토시의 고도칸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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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쪽

 

일본 역사상 천황과 공경과 전국의 다이묘들까지 직접 서명한 문서는 <5개조서약문> 하나밖에 없다.

(중략)

참고로 <5개조서약문>이 포고된 날, 1868년 3월 14일은 도쿠가와 막부가 사실상 막을 내린 날이다. 이날 에도 시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유신 정부 측과의 협상 끝에 에도성을 스스로 열고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중략)

<5개조서약문> 선포의례는 정통성, 근대성, 공공성의 통합을 선언하는 것임과 동시에 각각의 정신을 대변하는 세 세력의 정치적 연대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114쪽

 

후기 미토학의 최대 업적은, 당시 일본이 처한 대외적 위기는 개별 번이나 막부의 위기가 아니라, 일본 전체의 위기라는 인식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다. 후기 미토학은 미토를 중심에 두고 국방 정책, 대외 정책, 경제 정책, 사회 교육 정책 등을 고민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지평에서 대외적 위기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후기 미토학은 대외적 위기를, 개별 번이나 막부의 위기가 아니라 일본의 존망과 관련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242쪽

 

요코이 쇼난은 공적인 일을 모든 계층이 함께 결정한다는 의미로, '공공(公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요코이 쇼난의 사상적 독창성은 이처럼 송대 이후 주자학에서 계승되어온 '公'의 개념을 근대적 정치 제도로 새롭게 구상했다는 데 있다. 더욱이 군주와 그 아래의 관료, 의원 등 지배 계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가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요코이 쇼난의 '공공(公共)'의 개념은 그 이저의 학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314쪽

 

조슈 모리가는 다른 다이묘 가문과 달리 천황가와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쇼군가나 무사 가문 출신의 다른 다이묘 가문과 달리 모리가는 천황가와 혈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에도 시대에는 다이묘가 직접 조정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가는 예외적으로 교토 출입이 허용되었고, 교토 번저도 가지고 있었다. 연말연시에는 부케텐소를 통해 정기적으로 조정에 물품을 헌상하였고, 조정이 어려울 때에는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모리가에 대한 조정의 신뢰도 매우 두터웠다. 막부 말기 조슈의 존왕양이론과 일관된 반막부 노선에는 천황가와의 이같은 특별한 관계가 배경에 있었다.

 

460쪽

 

유신정부가 인수를 거절한 구번 채무는 덴포 연간 이전부터 상환되지 않고 반복되어온 것이었다. 이 채무는 모두 고채(古債)로 분류되어 무효화되었다.

(중략)

다이묘들의 채무는 상인들 측에서 보면 받을 가능성이 희박한 일종의 분량 채권이었다. 그래도 상인들은 이 채권들을 명목상 자산으로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정부의 처분에 의해 파산하는 상인들이 속출했다. 특히 에도 시대 전국에 걸친 유통망을 형성하여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오사카 상인들은 이 조치로 큰 타격을 입었고, 오사카는 경제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많이 잃게 된다. 반면 구번주나 그 가신들은 채무를 전액 면제받아 큰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624쪽

 

오쿠마(영국식 정당내각제를 주장한 오쿠마 시게노무)는 유신 정부에서 축출된 이듬해(1882년) 10월 21일 법학, 정치경제학, 영문학, 물리학 4개 학과를 둔 도쿄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1902년 이 대학의 이름을 자신이 자란 마을의 이름을 따 와세다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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