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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2018)

독서일기/법률

by 태즈매니언 2019. 10. 14.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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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양형 이유>에 이어서 이 책도 판사의 직업 에세이. 저자가 십여 년의 판사생활 끝에 사직하고 현재는 행정부인 방위사업청 특수함사업팀장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점 때문이었다. 법조계가 아닌 다른 직업인(정치인이나 교수 말고)으로서 판사라는 직업을 복기해본 분들은 거의 없지 않을까? 게다가 저자 정재민님은 소설을 세 권이나 써내기도 하셨다고.

 

<검사내전>과 <어떤 양형 이유>가 좋았던 이유는 두 책의 저자들이 소위 '잘나가는' 검사와 판사가 아니었고, 본인들도 그러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살짝 아쉬웠던 부분이 현직에 있고, 특별히 문제가 없다면 아마 정년까지 근무하고자 하기 때문에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한 좀 더 솔직한 이야기는 아낀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는 히어로물의 영웅 못지 않은 막강한 힘을 가진, 단 3천 명에게만 허락된 법복을 스스로 반납하고 나온 분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었다.

 

목차 구성부터 신선했다.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재판장의 말로부터 진술거부권 고지와 인정신문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판결선고까지 형사사법절차 중 재판장이 주재하는 공판절차의 흐름에 따라 각 절차가 형성된 유래와 제도,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만났던 피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형사재판실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보기에 유용한 교양서다. 저자 자신이 아버지의 문제로 형사사법제도의 피해자가 되어 본 경험을 토로한 부분을 보면서 셀럽의 마력에 취한 전직 법관의 회고담은 아니라는 느낌도 들더라.

 

<검사내전>에 대응하는 형사부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탐구생활은 <어떤 양형 이유>보다 이 책이 더 맞는 것 같다. 요즘 언론보도나 게시판에 사법개혁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런 책처럼 실무를 하거나 했던 사람이 구체적으로 토로하는 불합리한 시스템과 절차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조명을 받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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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납니다. 시작하는 상처는 당사자들끼리 주고받은 것이지만 마지막 상처는 판사가 줍니다. 당사자의 상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판사도 남의 치부를 드러내고, 잘못을 지적하고, 처벌을 할 때마다 상처를 받습니다.

 

23쪽

 

판결문을 너무 길게 쓰면 재판을 받은 당사자나 피고인조차 읽기 어렵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판결문이 점점 길어지는 것은 상급심 판사들이 보통 긴 판결문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사건을 하급심 판사가 잘 정리해주고 자세히 설명해주면 상급심에서는 좋아할 수밖에 없다.

 

224쪽

 

재판마다 피해자에게 재판 기일의 일시, 장소를 알려주는 것은 어떨까. 피해자가 오고 싶지 않아서 나오지 않는 것은 무방하지만 나오고 싶은 데도 아무도 초대하지 않아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법정에 '피해자석'도 놓아주면 안 될까.

 

235쪽

 

편안함의 가치를 청년 시절에는 잘 몰랐다. 편안해지는 것이 별 대수롭지 않은, 쉬운 일인 줄 알았다. 심지어 편안한 사람이 지루하고 유약한 사람인 줄 알았다. 피가 뜨겁던 시절이다보니 치열하고, 특별하고, 강한 매력과 개성을 가진 사람에게 끌렸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인가를 절감한다.
여기서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은 강박증도, 일중독도, 열등감도, 인정욕구도, 결벽증도, 불안으로 인한 조급증도, 피해의식도, 날카로운 공격성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266쪽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형량이 약해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인간의 고결함과 위대함에 대한 기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중략)
형량이 약해지는 것은 어쩌면 점차 나 자신을 피해자보다 피고인에게 투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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