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읽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알량한 서평으로 저자가 놓쳤거나 방향을 잘못 잡은 부분, 훌륭하니 좀 더 살을 붙였으면 싶은 부분에 대한 의견이 자칫 오만한 훈수가 되면 위험하다.
내게는 취미일 뿐인 이러한 일들을 돈을 받는 직업으로 하시는 분들이 출판사의 편집자들이니. 세종시 다정동 조기축구회에서 공 좀 찬다고, 프로리그나 최소한 실업리그의 주전선수가 손을 본 결과물에 대해 품평을 하는 셈이니.
(편집자라고 자기가 내고 싶은 책을 충분한 기간동안 준비해서 내는게 아니라는 게 나같은 사람에게 유리한 점이긴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나만의 공간을 꾸며보고자 마음먹고 결행을 한 끝에 자신의 노후 생활의 방향도 크게 바뀌었다는 점에서 내게 큰 도움이 되었고, 단순한 한옥 대수선 후기가 아닌 깊이 있는 에세이였다.
50대 초입에 신도시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100권이 넘는 책을 만들어낸 편집자에서 1인 출판사의 대표(출판사 이름이 집주소인 '혜화1117'이다.)가 되신 이현화 대표님의 작은 한옥 수선기를 읽으며 10년 후의 내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 부분이 많더라.
내가 자식이 없는 삶을 선택했기에 자신이 살고간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을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이 깊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 책은 이현화 대표님의 한옥이 완공된 2018년 겨울로 끝나지만 대표님의 블로그의 한옥수선기 카테고리에는 입주 후의 감상도 계속 연재되고 있다.
( http://blog.naver.com/PostList.nhn?blogId=hyehwa11-17&from=postList&categoryNo=6 )
'혜화1117' 블로그를 보고 알게된 사실인데 내가 얼마전에 인상깊게 봤던 <서촌홀릭>의 저자 로버트 파우저님의 신간 <도시탐구기>가 이현화 대표님의 혜화1117 출판사에서 나왔더라. ^^:
그나저나 저런 구름모양의 반투명 유리는 어릴 때 정말 흔했는데 지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니. 이 오래된 유리를 잘 살려서 수선한 집 곳곳에 활용하신 정성과 마음이 아름답다. 공간의 역사성은 이런 마음들이 켜켜이 쌓여서 생기는 것이겠지.
라이프 스타일의 차이겠지만 주방과 다이닝 공간이 저리 좁다니. ㅠ.ㅠ 저자와 건축가님이 오랜 기간 고민하여 도출한 최적의 방안이었을 테지만 그래도 아쉽다. 집을 찾는 이들과 무언가를 함께 요리해서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데. 서까래를 노출한 화장실의 겨울철 냉기도.
-----------------------------------------
52쪽
나는 새로 고쳐 살 이 집의 80년 후를 떠올렸다. 이 집에 처음 살던 분이 이 세상에 안 계신 것처럼 그때 나는 없을 것이다. 그분은 안 계셔도 이 집이 있는 것처럼 나는 없어도 이 집은 남아 있을 것이다. 집을 짓는 일이 세상에 뭔가를 남기는 행위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졌다. 나를 위한 집이기도 하지만 이 집은 내가 떠난 뒤 살아갈 얼굴 모를 누군가를 위한 일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손에 쥐어진 이 공간의 결정권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112쪽
오래된 집을 새로 고치기 위해 집주인인 나는 수십 개의 선으로 내가 원하는 공간을 설명했다. 이 집의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헤아릴 수 없는 선을 그려 도면을 완성했다. 공사를 시작한 뒤 이 집의 목수는 건축가보다 더 많은 선을 그려야 했다. 건축가가 문 하나의 선을 그려놓으면 그 선을 따라 수십, 수백 번의 대패질이 뒤따른다. 종이 위의 선만큼 눈에 보이는 선들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117쪽
집을 지어보니 알겠다. 화장실이야 말로 건축가와 건축주의 미감과 센스의 결정판이라는 것을.
126쪽
숙련은 시간을 단축시키되 세월은 체력을 약화시킨다. 숙련된 솜씨만큼 약해진 체력을 잘 다스려 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고 싶은 일을 오래,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고 살 수 있다.
204쪽
때때로 형식은 내용을 규정하고 지배한다. 나는 이 작업실을 살아가면서 내가 취할 형식의 틀로 삼고 싶다. 내가 창조한 이 형식 안에서 책을 만들고 일상을 꾸려나갈 것이다.
이 공간은 아주 오래 한우물만 파온 수많은 이들의 손길로 완성되었다. 이 안에서 나 역시 오래오래 한우물을 팔 것이다. 세월의 깊이가 곱게 쌓인 결과물을 하나씩 만들 것이다. 이 다짐은 어쩌면 자칫 편집자로 그만 살 뻔했던 나에게 여전히 책 만드는 즐거움을 간직하게 해진 이 집과의 인여에 감사하는 나만의 답례일지도 모른다.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2016) (0) | 2019.11.25 |
---|---|
[박지현] 365일 건축일기(2018) (0) | 2019.11.24 |
[정수윤] 도시주택산책(2018) (0) | 2019.11.24 |
[로이드 칸] 적당한 작은 집(2017) (0) | 2019.11.23 |
[MGH BOOKS] 일본 젊은 건축가들의 단독주택 설계기법(2018) (0) | 2019.11.23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