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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카진스키/조병준 역] 산업사회와 그 미래(1995)

독서일기/테크놀러지

by 태즈매니언 2020. 1. 23.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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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묵님덕분에 알게 된 걸작. 테오도르 카진스키(일명 '유나바머')가 1995년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에 기고했던 본문만 읽으면 족하다.

 

겨우 140페이지 남짓의 글이고 저자의 천재성에 감탄하면서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어려웠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는데도 아이큐 167에 빛나는 카진스키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의 스케일과 생각이 도약하는 징검다리들을 따라가야 했으니.

 

읽으면서 난 98년에 왜 이런 선언문은 안읽고 <공산당 선언>이나 공부하고 있었을까 여러 번 자책했다. 그나마 내가 이 책을 읽고 감탄할 수 있게 된 건 카진스키가 이 원고를 언론에 게재한 때부터 25년을 더 살아오며 카진스키가 예측했던 기술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변동들이 실제로 일어난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카진스키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가 공개되었을 때도 탁월한 정치철학이라고 극찬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 때 칭찬했던 사람들이 지금 다시 읽는다면 몇 배 더 감탄하리라 장담한다.

 

네 번째 사진으로 찍은 한 페이지 내용처럼 워낙 통찰력이 담긴 글들이 많아서 인용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근대기계문명을 거부하는 카진스키의 아나키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좌파'라 자부하시는 분들, 기술적 특이점이 왔을 때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카진스키의 글을 읽으면서 1960년대 초반 그가 앤아버에 있는 좌파들의 소굴이었던 미시간 대학교에서 수학과 석사과정을 밟았고 월남전 반전운동이 시작된 버클리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했던 게 좌파에 대한 증오감을 키우게 된 큰 원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어서 좀 안타까웠다.

 

카진스키가 평생 딱 한 번 고무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여성에게 사랑 고백을 했던데(그나마 차이고 해고됨), 그가 상당기간 지속된 연애관계를 해봤더라면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생각도 수정됐을 것 같고.

 

나도 카진스키가 지적하는 것처럼 하나의 개인으로서, 어디서부터 저항해야할지, 어디가 약한 고리인지 찾기도 힘든 거대한 산업사회의 시스템에 무력감을 느끼고, 체제가 허용해준 사소한 '대리만족 활동'들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 최소한 주말이라도 산업사회 체제에서 벗어난 생활을 한다면 이러한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어 고민 중이고.

 

다만 카진스키가 민주적인 산업 체제와 독재자가 통제하는 산업 체제 간 차이를 사소하다고 본 부분은 동의하지 못하겠다.

 

독재자들이 통제하는 산업 체제가 오히려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는 걸 지금의 중국이 보여주고 있다. 중국처럼 테크놀로지에 대항하는 보호막 역할을 하는 법률, 제도, 관습, 윤리규악이 약한 나라가 있을까?

 

만약에 중국이 '천망(스카이넷)'을 개량한 생체인식 감시시스템을 구축해서 범죄자를 100% 검거하고, 검거된 범죄자들을 뇌수술을 통해 교정하여 재범율을 낮추는 것은 물론, 인간 수명을 늘릴 수 있는 장기이식 기술을 상용화해서 국가가 인정하는 사회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는 인물들의 생명을 연장해주는 혜택을 베푼다면 과연 한국이나 서구의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우리도 중국처럼 기술개발을 가로막는 제도적 장애물들을 철폐하고 어서 빨리 특이점을 맞이하여 하이퍼휴먼으로 진화하자고 주장할까?

 

아니면, 이러한 테크놀로지를 단호히 거부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중국의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다국적 성전을 벌이겠다고 선전포고를 할까?

 

나는 다국적 성전에 참여할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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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쪽

 

116. 체제가 인간 행동을 수정하기 위해 가하는 끝없는 압박으로 인해, 사회의 요구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예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 사회보장으로 연명하는 사람들, 청소년 갱단, 광신자, 반정부 폭도, 과격한 환경주의자, 파괴주의자, 학교 중퇴자, 반항아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74쪽

 

119. 체재는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존재할 수도 없다. 거꾸로, 인간의 행동을 체제의 욕구에 맞춰 수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테크놀로지 체제를 이끌어 가는 척하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테크놀로지 자체의 결함일 뿐이다. 체제를 이끌어 가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기술적 필요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체제는 여러 가지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하지만 대체로 체제가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체제 자체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체제의 욕구이지, 인간의 욕구가 아니다.

 

 

100쪽

 

155. 우리 사회는 체제와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든 종류의 생각이나 행동을 '질병'으로 간주한다. 어느 개인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할 때 그것은 체제에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개인도 고통을 겪게 되므로, '질병'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체제에 적응하도록 개인을 조작하는 것은 '질병'에 대한 '치료'이고, 좋은 일이다.

 

128쪽

 

208.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소규모 테크놀로지며, 다른 하나는 조직의존형 테크놀로지다. 소규모 테크놀로지는 소규모 공동체가 외부 지원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말한다. 조직의존형 테크놀로지는 대규모의 사회 조직에 의존하는 테크놀로지다. 우리는 소규모 테크놀로지가 후퇴한 적은 한 번도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조직의존형 테크놀로지는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조직이 붕괴할 때 함께 후퇴한다.

 

132쪽

 

216. (전략) 미국의 경우, 몇십 년 전 대학에서 좌파가 소수였을 때, 좌파 교수들은 열렬히 학문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가 주도권을 쥔 대학들에서 좌파들은 나머지 모든 사람으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이것이 바로 '정치적으로 옳은 운동'이다.) 똑같은 일이 좌파와 테크놀로지 사이에도 벌어질 것이다. 일단 테크놀로지를 자기 통제 하에 넣고 나면, 좌파는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나머지 모든 사람을 억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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