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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김상훈] 숨(2019)

독서일기/SF

by 태즈매니언 2020. 2. 20.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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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2002)>를 인상깊게 봤으면서도 작년 봄에 나온 그의 두 번째 단편집을 서둘러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절판본을 구해서 읽었던 중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보고서 이 대단한 작가는 후다닥 한 번 읽고 넘길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느긋하게 하드 SF가 읽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타임라인이 폐와 숨에 관한 일차원적인 이야기들로 피로한 오늘 같은 날.

 

2년에 한 편 꼴로 발표하다보니 15년 넘는 기간 동안에 쓴 작품들이 한 권에 담겨 있었다. 한 번 쓴 연구보고서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도 괴로워하는 입장에서 몇십 페이지 남짓의 단편을 구상하고 한땀 한땀 오래 고쳐쓰는 집중력과 완성도에 대한 높은 기준을 가늠하기 어렵다. 독자로서야 행복하고.

 

테드 창에게 노벨문학상을 줘야 하지 않나 싶다. 2016년 밥 딜런의 수상도 있었으니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은데. 수록 작품들 가운데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다시 읽어도 역시 좋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표제작 <숨>의 순서로 특히 좋았다.

 

인간의 기억과 자유의지, 인공지능, 타임머신, 양자역학과 복잡계, 언어의 습득 등에 대해 많지 않은 분량으로 이렇게 잘 전달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선물처럼 붙어있는 창작노트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줬다.

 

올해의 책 후보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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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쪽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발견적 논리를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합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

 

301쪽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327쪽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글쓰기는 테크놀로지다. 따라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의 사고 과정에는 테크놀로지가 매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순간부터 우리는 인지적 사이보그가 되며, 그 사실은 우리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340쪽

 

말을 할 때, 우리는 우리 폐의 숨을 이용해, 우리의 생각에 물리적인 형태를 부여한다. 우리가 내는 소리는 우리의 의도인 동시에 우리의 생명력이다.

 

499쪽

 

나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정서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다. 섹스 로봇과 열애에 빠지는 사람들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뜻은 아니다. 진정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중략)

따라서 인공지능이 법적 권리를 획득한다면 큰 진전이겠지만, 인간 측에서 인공지능과의 개인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일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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