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선 작가님께서 추천하셔서 사게 된 책인데, 이건 한 사람이 쓴 여러 글들을 모은 편집물이지 책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공저한 <추월의 시대>에서는 저자분의 파트가 난삽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500페이지 가량 되는 책인데, 왜 책 제목이 <상식의 독재>인지는 서두 부분과 끝부분 정도에만 좀 나오네요. 제목과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는 중간부분들의 내용들을 확 줄였으면, 300페이지 가량으로 가독성을 높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서론에서는 ’한국 사회 상식의 형성과 분화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그 탐구가 분량의 대부분이 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소농사회의 유산에 대한 이철승의 <쌀 재난 국가>에 대한 보론, <반일 종족주의> 등 이영훈 교수에 대한 반박,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 대한 비평이 연결되는 느낌을 못받았고요.
저자가 좋은 책들을 엄청 많이 읽었고, 요새 다들 한탄하는 한국사회의 높은 ‘표준압’의 명암에 주목한 것도 좋았습니다. 날카로운 표현들도 꽤 보였고요. 그래도 아쉽네요. <생각의힘>에서 이렇게 완결된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 책을 낸 게 의외다 싶었는데, 저자가 출판계약 후 무려 6년 넘게 지나서야 나온 책이었다는 걸 확인하니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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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가진 게 별로 없는 이들에게 ‘너희들의 결정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는 선택지를 주는 것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위안을 준다. 아무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꽹가리나 쳐대는 이 사회를 우리의 선택으로 망하게 하겠다는 그런 위안 말이다.
25쪽
나는 ‘한국적 삶’의 명과 암을 동시에 규정하는 핵심적인 속성을 ‘주류-표준-평균에 속한 이에게 제공되는 엄청난 편의성, 그리고 그 바깥 다양한 삶의 양태에 대한 철저한 무신경함‘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이는 한국 사회의 빠른 변동과 성공을 설명할 수 있는 속성이기도 하고, 이 사회가 누군가에게는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속성이기도 하다.
33쪽
나는 최근 20년간 누적된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혼란을 이 ’분화하는 상식들의 투쟁‘이란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한다.
232쪽
한국 사회의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이라는 시공간에서 진행된 개발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유교적 세속주의‘가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잘 진행된 사회에서 가능했던, ’도구론적 정치관‘을 통해 수행됐다.
294쪽
나는 오구라 기조가 묘사한 ’도덕 지향성에 의거한 치열한 명분 쟁탈전‘이 한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제는 그 기준이 이기론이 아니라 상식론이 됐다고 주장할 참이다.
448쪽
한국에선 소위 엘리트란 사람들도 자기 영역이나 전공만 벗어나면 ’상식‘ 수준의 인식으로 다른 엘리트들을 공박하며, 내 말이 더 맞다고 우기곤 한다. 따라서 대중을 경멸하는 그들 ’엘리트‘는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개별 직군의 자칭 엘리트‘에 국한되며, 시민의 관점에서 그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한국 사회엔 어떠한 엘리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은 그저 상식이 통치하는 사회일 뿐이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467쪽
나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핵심은 ’인간의 생활에서 타인의 중요성이 감소하기 시작하고 끝내는 그 필요성이 0에 수렴하게 되는 시대‘라고 진단한다. ’사회적 동물‘이라던 인간이, 여전히 사회 속에서 살지만 사실상 혼자 사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요약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인지‘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하게 될 것이지만, 그 사실을 미처 느끼지 못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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