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천관율] 줌아웃(2018)

독서일기/한국사

by 태즈매니언 2018. 9. 9. 23:37

본문

 

충분한 온라인 유로구독 독자층을 보유한 영어권 매체를 제외하고는 각자도생의 완전경쟁 시장이 되어버린 언론계에서 자사의 핵심인력인 기자들에게 요구하는 압박이 어떤 수준일지 안온한 공공기관의 울타리 안쪽에 있는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원래부터 퇴직연령이 빠른 직업군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처럼 직업의 미래에 불투명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기자 개인에 대한 보상체계도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시사in> 창간 이후 초장기에 몇 년, 그리고 중간에도 영업사원의 재구독 요청을 받고 마음이 약해져서 1년 구독했었는데, 결국은 논조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아져서 구독연장을 안하게 되더라.

 

그래도 분석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떠나 만족스럽게 읽은 기사를 쓰는 시사인 기자분들 중 한 분이 천관율님이었다. 지금은 페이스북 먼저보기로 접하는데 여전히 좋은 글을 써주시고 있고.

천관율님이 쓰셨던 기사와 페이스북 글들 중에서 2012~17년 5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들에 관한 분석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이 나왔다. 27편의 글을 읽어보니 촛불민주주의를 정체성으로 삼는 이번 정권의 집권당과 청와대에 있는 분들이 임기 중반을 맞이하여 자신들의 좌표를 재설정하면서 읽었으면 싶다. 이왕이면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도 같이.(나도 한 번 더 읽어야 할듯.)

 

다만 내 또래인 천관율 기자님이 일베 연구자 김학준씨의 시각으로 본 일베의 메커니즘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짚어낼 수는 없지만 지금의 20대 남자들이 수긍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최소한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소모되는 남자>에서 제시한 설득력있는 반론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

 

105쪽

 

병원은 간병 업무를 가족에게 떨어낸다. 정부도 그 덕에 간병 업무를 건강보험으로 보전해줄 필요가 없다. 부담은 환자 가족에게 전가되고, 가족들은 '다인실-비전문가 간병'조합으로 비용을 최소해 방어한다.
누구도 비용을 부담하려 들지 않을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당장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안전 관리 비용이다.
(이번 메르스 전파에 대한 대처는 과연 2015년과 얼마나 다를까? 또 현장 의료인력의 대가 없는 헌신으로 감당해야 할까?)

 

108쪽

 

외래 진료는 '규모의 경제'가 관철된다. 의료 수가는 진료 건수대로 일괄 책정되는데 핵심 비용인 인건비는 고정비다. 병원경영자의 관점에서 보면, 외래 진료를 최대한 많이 돌릴수록 수익이 올라간다. 웬만하면 보내는 1차 의료기관과 웬만하면 받는 3차 의료기관의 이해관계는 이렇게 만나고, 브랜드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은 기꺼이 이 파이프라인을 타고 대형 병원으로 흘러간다.
모두가 나름의 합리적 판단으로 움직인다. 그 결과는 지독한 '과적'이었다. 황승식 교수는 "온 국민이 '빅5'에 올라탄 과적 상태로 의료 시스템이 항해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과적은 차라리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수익 모델인데, 리스크를 없는 셈 쳐서 비용을 줄이는 것이야 말로 과적 모델의 핵심이다.

 

126쪽

 

국회선진화법은 일종의 상호 군비 감축 협약이었다. 소수당-야당은 '예산안 연계 투쟁, 의장석 점거 투쟁'을 내려놓고, 다수당-여당은 '직권 상정'을 내려놓는 맞교환이 핵심 뼈대다. (중략) '국회에서 마음대로 굴려면 50%가 아니라 60%를 넘겨라'로 요약할 수 있다.

 

213쪽

 

민주주의 핵심 기구인 입법부가 기능장애를 겪을 때, 진지한 민주주의자라면 기능장애를 고쳐 쓸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정치 혐오에 편승하려면 입법부를 약화시키는 '제물 바치기'를 주장하면 쉽다. 이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진짜 기득권을 민주적 감시로부터 더욱 자유롭게 한다.

 

235쪽

 

역설이다. 조정자는 위대할수록 주목받지 못한다. 성공한 조정은 외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직 실패한 조정만이 파국을 만들어내며 외부에 알려진다. 조직실장 오재영은 정당 인생 내내 당 밖에서는 철저한 무명이었으니, 무명이란 성공한 조정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280쪽

 

한국 노동시장이 직면한 근본 문제는 기업의 숙련 노동 수요와 구직자의 좋은 일자리 수요, 둘 사이의 거대한 불일치다. 보수의 대안은 어쨌거나 이 근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미덕이 있다. 반면에 진보의 대안은 근본 문제에 대안을 내놓기 보다는 국가의 규제라는 '더 이상 듣지 않는 만병통치약'으로 우회한다. 노둥시장의 분절 구졸르 몸으로 느끼는 한계 노동자와 구직자의 눈에 어느 쪽이 더 정직한 태도로 보일까.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